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호 시인 / 속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6.

정호 시인 / 속내

 

 

동강 벼랑바위 맞은 편 모래톱에서

손바닥만한 꺽지를 낚았다

물씻김 좋은 물바위에 걸터앉아 배알을 따고

부레와 쓸개 내장을 후벼내는데

억센 등비늘이 따끔! 손가락을 찌른다

멈칫, 하는 순간 꺽지는 푸득거리는 감촉만 남긴 채

미끄러지듯 내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순식간에 새파란 물속으로 사라진다

내장도 모조리 빼놓고 어디로 갔을까

깊은 물속 기웃거리다가

속내 털린 통증을 자갈 사이에 파묻으며

굵은 소나무 밑둥치 같았던 삶의 굴곡 우툴두툴 파헤치다

통점도 접고 생각마저 비우고

끝내 기진하여 물 위에 허연 배 띄우리라

용도 폐기된 기관들

나는 꺽지 내장을 강물에 내던진다

부레 쓸개 동동 떠내려간 산그림자 짙은 자리

잘 닦인 물거울이 나를 비춘다

한때는 불 같은 열정으로 타올랐던

허영으로 치장하고 때론 이웃과도 등 돌리던, 이제는

배롱나무 껍질 같은 밋밋한 마음자리

간 쓸개 다 빠져나간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정호 시인 / 자란(雌蘭)에 꽃피다

 

 

도서관 입구 안내대에 그 여자 있네.

수많은 철부지 학생들

열람실로 전자정보실로 오가지만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화장 한 번 한 적 없어도 늘 청초롬한

몸피도 가냘픈 저 여자.

그래도 사랑의 열병은 꼭 앓아야 했는가.

여름 방학으로 폐관된 저 휑뎅그렁한 적막강산에서

아무도 몰래 투명하게 물컹한 살갗 드러내고

그 수줍은 내숭 스르르 발겨보는

은밀한 곳 이슬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는

연보라색 저리도 아찔한 암팡내.

 

홀린 듯 내 눈앞이 캄캄하다.

 

 


 

정호 시인

울산 울주에서 출생. 2004년 《문학•선》을 통해 등단. 시집: 「비닐꽃」과 「은유의 수사학」 「철령으로 보내는 편지」가 있음. 화시동인회장, 문학ˑ선작가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차장 역임. 2018 현재 서울미술고 재직 중. 돌밭수석회 고문, 다층 동인, 웹진시인광장12기, 가온문학, 시선 편집위원. 2011 안양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문학상 시부문 수상(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