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환 시인 / 낙화유수(落花流水) ―백담시편·5
새끼손톱만한 것들이, 꼭 속손톱만한 것들이, 연보라와 연분홍과 하양 들이 개울물 위에서 길을 트고 있다 하물며 어떤 치들은 돌돌돌돌 물소리까지 내고 있다 낙화유수랬다 나도 지금까진 꽃잎이 그냥 물에 떠서 흘러가는 줄 알았다 쬐끄만 개울물서껀 가을꽃잎들이 저렇게 다투어 길을 트는 광경은 처음인데 어떤 하양은 홑청에 바늘로 맑게 시침질하듯이 하고 또 어떤 하양은 햇빛 같은 물방울들을 얇은 습자지에 베껴 쓰듯이 하고 어떤 연보라는 물살을 한 눈금 두 눈금 곱자로 재듯이 하고 또 어떤 연보라는 소금쟁이처럼 잡았다 당겼다 미끄러지기만 하고 또 어떤 연분홍은 연분홍끼리 수면을 울력하듯 떠메고 다니며 분주히들 길을 트고 있다
가을꽃잎들이 트는 그 길을 내가 한눈팔 듯이 구경하는 사이 수십만 년은 또 거뜬히 흘러갔겠다
오태환 시인 / 별빛들을 쓰다
필경사(筆耕師)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묵란(墨蘭) 잎새처럼 쳐 있는 것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의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圖章)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고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뜬 흰 섬들을 바라보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 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삐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지금 알겠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더 녹청(綠靑) 기왓장 위 별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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