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 시인(김제) / 모과
슬픔은 숨겨진 그림자의 어두운 얼굴
내 그리움은 간이역 주차장에 방치되어 있다.
젊은 날에 나를 감동케 한 페이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살기 위해 살고 있다는 말처럼 이 고독은 너무 참을 만해서 견디기 힘들다
스마일마스크를 쓰고
나는, 울고 있다
-시집 『그림자 골목』에서
정병호 시인(김제) / 개복숭아꽃
그녀의 남편은 겨우내 피똥(血便)을 쌌다. 큰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차도가 없었다. 죽음처럼, 기저귀 틈새로 피똥이 삐져나와, 새로 기저귀를 채우고, 피똥 묻은 이불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여기저기 묻은 피똥을 닦는 일로 그녀의 겨울이 갔다. 남편이 물에 젖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아이처럼 배시시 웃을 땐 하루라도 빨리 죽어주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화장터 가는 길, 그의 피똥처럼 붉은 개복숭아꽃이 낮의 빛으로 어둠의 깊이를 재고 있다.
어둠을 밟고 가는 모든 곳에서 저 스스로 빛이 되고 있었다. 딱딱한 슬픔은 부드러워지고 눈물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붉은 죄가 기억의 문을 열고 활짝 피었다.
세상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시집 『그림자 골목』에서
정병호 시인(김제) / 그림자 골목
길은, 나른한 고양이 수염처럼 아득하다.
일상에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은 책임이 들어 있다.
많은 이름들이 나를. 그림자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몸에서 가장 먼 발끝, 내려다보는 자리가 벼랑이다.
풍경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간격 골목길 마지막 집의 백열등 노란 빛이 캄캄한 바다의 등대처럼 먹먹한 내 가슴에서 깜박거린다.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가로등 아래서 찾고 있다. 그림자가 나를, 보고 있다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시집 『그림자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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