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회진 시인 / 말하지 못한 말
앞집 할매 담장 위로 쑥 고개 내밀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뭣하요?
종일, 무화과나무 아래 놀고 있는 어린 고양이들을 보았어요 고양이를 지키는 어미 고양이를 보았어요 텃밭에 옮겨 심은 상추는 언제쯤 뿌리 내려 와싹와싹 자랄까 생각도 했어요 드디어, 저 멀리 산 아래 기차가 지나는 시간을 적어두었어요 배가 고프면 감자를 쪄서 검은 개와 나눠 먹으며 햇살 잘 드는 마루에 나와 시를 읽어요 그러다가 담장 너머 감나무 잎사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오래 바라봤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따, 마당에 풀이 가득하고만, 할 일이 많겄소
풀을 다 뽑아버리면 풀벌레는 어디서 사나요? 여름밤 풀벌레 소리는 어떻게 듣나요? 그러면 제 귀는 밤새 잠 이루지 못할 텐데요, 마당을 북방의 초원이라 부르고 싶어요 무성해진 그곳에 누워 은하수를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강회진 시인 /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삼십 년 동안 아비의 생을 지탱해 준 버드나무 한 그루 도대체 얼마나 한다고 오라비는 제멋대로 버드나무를 팔아버렸나 덩달아 뿌리째 뽑혀나가 마구 뒹구는 기억들 버드나무 아래 앉아서 침착하고 내성적인 죽음을 기다리던 아비는 생생한 헛헛함으로 허둥대신다
다 해봤어요 이생에서 더 해볼 게 없어서 버드나무가 돈이 되나 알아봤어요. 귀농한답시고 들어와 다 팔아치우는 오라비는 눈치가 없는 건가요, 배짱이 무궁무진한가요
아비는 아직 살아 있고 오라비는 돈을 벌었어요 실패했다, 라는 문장의 주어는 언제나 저예요 다행이지요 제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매번 지고 말아요 팔랑이던 초록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상냥했던 인생은 이제 바빌론 강가에서나 만날 수 있어요
버드나무 팔려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날, 눈먼 가수가 검은 제비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부르는 노래를 밤새 들었어요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고 혼자인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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