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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회진 시인 / 말하지 못한 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0.

강회진 시인 / 말하지 못한 말

 

 

앞집 할매 담장 위로 쑥 고개 내밀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뭣하요?

 

종일, 무화과나무 아래 놀고 있는 어린 고양이들을 보았어요

고양이를 지키는 어미 고양이를 보았어요

텃밭에 옮겨 심은 상추는 언제쯤 뿌리 내려 와싹와싹 자랄까 생각도 했어요

드디어, 저 멀리 산 아래 기차가 지나는 시간을 적어두었어요

배가 고프면 감자를 쪄서 검은 개와 나눠 먹으며

햇살 잘 드는 마루에 나와 시를 읽어요 그러다가

담장 너머 감나무 잎사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오래 바라봤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따, 마당에 풀이 가득하고만, 할 일이 많겄소

 

풀을 다 뽑아버리면 풀벌레는 어디서 사나요?

여름밤 풀벌레 소리는 어떻게 듣나요?

그러면 제 귀는 밤새 잠 이루지 못할 텐데요,

마당을 북방의 초원이라 부르고 싶어요

무성해진 그곳에 누워 은하수를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강회진 시인 /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삼십 년 동안 아비의 생을 지탱해 준

버드나무 한 그루

도대체 얼마나 한다고

오라비는 제멋대로 버드나무를 팔아버렸나

덩달아 뿌리째 뽑혀나가

마구 뒹구는 기억들

버드나무 아래 앉아서

침착하고 내성적인 죽음을 기다리던 아비는

생생한 헛헛함으로 허둥대신다

 

다 해봤어요

이생에서 더 해볼 게 없어서

버드나무가 돈이 되나 알아봤어요.

귀농한답시고 들어와 다 팔아치우는

오라비는 눈치가 없는 건가요,

배짱이 무궁무진한가요

 

아비는 아직 살아 있고

오라비는 돈을 벌었어요

실패했다, 라는 문장의 주어는 언제나 저예요

다행이지요

제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매번 지고 말아요

팔랑이던 초록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상냥했던 인생은 이제 바빌론 강가에서나 만날 수 있어요

 

버드나무 팔려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날,

눈먼 가수가 검은 제비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부르는 노래를 밤새 들었어요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고

혼자인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

 

 


 

강회진 시인

197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97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2004년 《문학사상》신인상 수상, 저서로는 시집 『일요일의 우편배달부』 『반하다, 홀딱』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와 포토에세이 『했으나 하지 않은 날들이 좋았다-몽골이 내게 준 말들』 등이 있음. 2020년 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