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24주일 방황하는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주님 제1독서 탈출 32,7-11.13-14 / 제2독서 1티모 1,12-17 복음 루카 15,1-32 가톨릭신문 2022-09-11 [제3310호, 18면]
길 잃은 양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 모든 사람 공평하게 감싸주신 예수님 각별한 사랑 잊지 말고 주님 따르길
빌헬름 폰 샤도 ‘잃어버린 양과 돌아온 탕자의 비유’.
예수님의 우선적 선택,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
문득문득 제 인생을 스쳐지나간 수많은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곤 합니다. 역경을 잘 이겨내고 나름 자리를 잡은 아이들 얼굴도 떠오르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면 마음이 가시에라도 찔린 듯 아파옵니다. 보육원, 상담소, 쉼터, 그룹홈…. 갈 수 있는 거의 모든 시설을 두루 섭렵한 한 아이, 그래서 더 이상 아무도 데려가기를 원치 않는 아이, 더 이상 보낼 곳이 없는 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제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맛이 간’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속상하고, 배신감 느끼고, 열불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자주 강조해왔습니다.
“착하고, 말 잘 듣고, 예의바르고, 고분고분한 아이, 우리가 제시한 노선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따르는 아이들은 사실 어디 가든 잘 견뎌낼 것입니다. 예쁘고, 귀엽고, 품에 ‘착’ 안기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시다. 우리의 선택은 보다 다루기 힘들고, 보다 ‘맛이 간’ 아이들, 결국 그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는 한 마리 길 잃은 어린 양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건강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길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는 기쁨을 삶의 최고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착한 목자임을 역설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들 셋을 두셨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걸리고, 밥숟가락 들 때 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아들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는 일마다 잘 풀려서 제 갈 길을 보란 듯이 걷고 있는 장남을 생각하면 걱정보다는 뿌듯한 마음에 안심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시작한 외국생활에 익숙해져서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고, 광활하며 청정한 주변 환경 속에 살아가는 차남 역시 생각만 하면 마음이 흐뭇해질 것입니다. 반면에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 결혼도 못하고,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해 전국산천을 떠도는 막내,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은 없는 막내아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옵니다. 눈물이 앞섭니다.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모든 자녀들이 다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더 마음이 가는 자녀, 더 기도하게 되는 자녀는 잘 안 풀리는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골고루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우선적 선택’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사에 잘 풀리는 사람들도 사랑하시지만, 그분께 가장 우선 눈길이 가는 대상은 길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어린 양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입니다. 좌절과 혼동 속에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끝도 없는 병고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극심한 고통 중에 살아가는 분들, 지금 이 순간 다시 못 올 길을 걷고 있는 분들, 끔찍한 외로움에 눈물 흘리시는 분들, 십자가가 너무 커서 어쩔 줄 모르는 분들,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하느님께서 한없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짠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받지 못할 각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한 축제의 날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 주변은 길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로 붐볐습니다. 사고뭉치들, 중죄인들, 세리들,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투성이 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출발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 여겨 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러했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더 이상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 7)
오늘은 다른 누구를 위한 날이 아니라, 바로 죄인인 우리를 위한 축제의 날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죄인의 멸망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하며 기뻐하며 다시 한 번 주님께로 돌아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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