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남 시인 / 농부의 명함
아버지가 명함을 새겨 오셨다. 밤새 어머니는 꼴난 주제에 무슨 명함이냐고 지겹도록 퍼부었다
순전히 농사만으론 자식들 공부 가르치는 게 힘들어 아버지는 막노동판에서 품을 팔았다 미장이 방수쟁이 어느 해부턴가 달력에 아버지는 매일 숫자를 써놓고 계셨다 1.0...... 1.0...... 1.0...... 1.0......1.0...... 그러다가 어느 날은 1.5라는 숫자를 적으셨다 그 날은 야근을 한 날이었다
중학교에 갓 들어간 봄날, 하교길이었다 학교 근처 공사장에서 아버지가 일하고 있기에 같이 가는 반 친구한테 우리 아버지 저기 있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공사장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내 친구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명함 하나 새겨 오셨다 그 숱한 세월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집을 가슴 속에서 지으며 살아 오셨을까
김명남 시인 / 고요를 들어앉히며
한소끔 끓던 염전이었다가 저수지였다가 발목을 붙드는 모진 양팔저울이었다가 시계추였다가
밑바닥에서 고개 내밀고 빛이건 돌이건 딱 잘라내라고 수없이 속삭였다 속삭임은 모두 질문이 되어 떠났으며 떠난 것들은 다시 질문이 되어 되돌아왔다
함부로 해집은 빛은 몇인지 마구 파헤친 노을은 또 얼마인지 수위를 넘은 헛헛한 농담이 이데올로기로만 다가왔던 슬픔이 가슴에 든 돌이 떠들썩함과 절절함 사이를 오가는 해산(解産)이었음을
오, 웅덩이를 흔드는 모진 바람이 종일 익은 구름을 충분히 식힐 즈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울임과 모퉁이를 쓰다듬는 질감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며 구겨진 생의 오전에 숨 불어넣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메아리로 남을 맨살에 오래 웅크린 햇살 한 올과 웅덩이에 새겨진 이슬 닮은 물무늬를 또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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