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명남 시인 / 농부의 명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6.

김명남 시인 / 농부의 명함

 

 

아버지가 명함을 새겨 오셨다. 밤새 어머니는 꼴난 주제에 무슨 명함이냐고 지겹도록 퍼부었다

 

순전히 농사만으론 자식들 공부 가르치는 게 힘들어

아버지는 막노동판에서 품을 팔았다

미장이 방수쟁이

어느 해부턴가 달력에 아버지는 매일 숫자를 써놓고 계셨다

1.0...... 1.0...... 1.0...... 1.0......1.0......

그러다가 어느 날은

1.5라는 숫자를 적으셨다

그 날은 야근을 한 날이었다

 

중학교에 갓 들어간 봄날, 하교길이었다

학교 근처 공사장에서

아버지가 일하고 있기에

같이 가는 반 친구한테 우리 아버지 저기 있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공사장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내 친구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명함 하나 새겨 오셨다

그 숱한 세월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집을 가슴 속에서 지으며 살아 오셨을까

 

 


 

 

김명남 시인 / 고요를 들어앉히며

 

 

한소끔 끓던

염전이었다가 저수지였다가

발목을 붙드는 모진

양팔저울이었다가 시계추였다가

 

밑바닥에서 고개 내밀고 빛이건 돌이건 딱 잘라내라고 수없이

속삭였다

속삭임은 모두 질문이 되어 떠났으며

떠난 것들은 다시 질문이 되어 되돌아왔다

 

함부로 해집은 빛은 몇인지

마구 파헤친 노을은 또 얼마인지

수위를 넘은 헛헛한 농담이

이데올로기로만 다가왔던 슬픔이

가슴에 든 돌이

떠들썩함과 절절함 사이를 오가는 해산(解産)이었음을

 

오, 웅덩이를 흔드는 모진 바람이

종일 익은 구름을 충분히 식힐 즈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울임과

모퉁이를 쓰다듬는 질감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며

구겨진 생의 오전에 숨 불어넣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메아리로 남을

맨살에 오래 웅크린 햇살 한 올과

웅덩이에 새겨진 이슬 닮은 물무늬를

또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김명남 시인

1969년 강릉에서 출생. 청주교육대학 졸업. 2000년 《작가들》 여름호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시평사, 2010)가 있음. 인천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역임. 현재 인천에서 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