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시인 / 꽃 한 시루
귀 떨어진 시루가 소복이 꽃을 쪄내고 있다 자석처럼 오싹 나를 잡아당긴다
옷 갈아입어라, 공 약방 뒷집에 도둑이 들었다 내가 왜? 죄 없는 아이가 촛불 켠 시루 속을 보면 도둑이 보인단다
불꽃이 뜨거운 혀로 눈동자를 핥아 내 눈은 밝아져 독사 같은 생에게 쫓기던 내 뒷모습만 침침하게 보이던 저녁 나보다 죄 없는 아이를 열 명도 더 떠올리는 동안 꽃다운 나는 녹아내려 시루에 갇혔다
목을 맸던 서까래에 팔을 떼어주고 가출한 아이 찾아 오며 다리를 떼어주고 입 크게 벌리는 강물에게 머리를 잘라주며 도망쳐 온 우둥퉁한 진흙소가 비닐하우스 뒤에 쪼그려 앉았다
돌려받아도 쓸데가 없어진 나를 한 시루 꽃 피워 돌려주는 시루도 늙어 나를 비우려 한다
조정 시인 / 길이 멀어서 허공도 짐이 된다
새들이 꽃 지는 소리를 입에 물고 날아갔다 요사채 댓돌에 젊은 중이 앉아 있다 러닝셔츠 바람에 선글라스를 끼고 어깨가 섹시한 동백 한 송이 떨어졌다 이만 총총 젊은 인사처럼 바람에 색이 묻어났다 길이 멀어서 허공도 짐이 되었다 대웅전 벽은 혼자 놀게 두고 새들은 알 속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꽃 속에 절을 매고 빨래를 널었다 이마 물렁물렁한 부도가 해를 비껴 서 있다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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