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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 시인 / 꽃 한 시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9.

조정 시인 / 꽃 한 시루

 

 

귀 떨어진 시루가 소복이 꽃을 쪄내고 있다

자석처럼 오싹 나를 잡아당긴다

 

옷 갈아입어라, 공 약방 뒷집에 도둑이 들었다

내가 왜? 죄 없는 아이가 촛불 켠 시루 속을 보면

도둑이 보인단다

 

불꽃이 뜨거운 혀로 눈동자를 핥아

내 눈은 밝아져

독사 같은 생에게 쫓기던 내 뒷모습만 침침하게 보이던 저녁

나보다 죄 없는 아이를 열 명도 더 떠올리는 동안

꽃다운 나는 녹아내려 시루에 갇혔다

 

목을 맸던 서까래에 팔을 떼어주고 가출한 아이 찾아

오며 다리를 떼어주고 입 크게 벌리는 강물에게 머리를

잘라주며 도망쳐 온 우둥퉁한 진흙소가

비닐하우스 뒤에 쪼그려 앉았다

 

돌려받아도 쓸데가 없어진 나를 한 시루 꽃 피워 돌려주는

시루도 늙어 나를 비우려 한다

 

 


 

 

조정 시인 / 길이 멀어서 허공도 짐이 된다

 

 

새들이 꽃 지는 소리를 입에 물고 날아갔다

요사채 댓돌에 젊은 중이 앉아 있다

러닝셔츠 바람에 선글라스를 끼고

어깨가 섹시한

동백 한 송이 떨어졌다

이만 총총

젊은 인사처럼

바람에 색이 묻어났다

길이 멀어서 허공도 짐이 되었다

대웅전 벽은 혼자 놀게 두고

새들은 알 속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꽃 속에

절을 매고 빨래를 널었다

이마 물렁물렁한 부도가 해를 비껴 서 있다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에서

 

 


 

조정 시인

1956년 전남 영암 출생. 1998년 국민일보 「신앙시 공모」 최우수상. 2000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이발소 그림처럼> 당선 등단. 서울 서초동 사랑의 교회 신문 「우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