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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완호 시인 / 시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31.

박완호 시인 / 시인

 

 

어둠이 닳아서 새하얀 빛이 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투명한 그물이 촘촘하게 날 에워쌀 때까지

 

시를 쓰다가

시가 되지 않는 말들과 함께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어느 먼 곳을 꿈꾸는 시간

 

닳다 만 어둠 같은,

더는 깊어지지 않는 절망 같은,

 

꽃 피지 않을 생각이

되지도 않게 시가 되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가며 어떻게든

 

어둠이 다 닳을 때까지

절망이 더는 깊어지지 않을

바닥에 누울 때까지

 

어떤 꿈도 더는 나를 가두지 못할

눈물의 바탕에 기어이 다다를 때까지

 

단 하나, 시인이라는

휑하니 빛나는 이름을 갖게 될 때까지

 

그것마저 죄다 떨쳐낼 때까지

안간힘을 다해 버텨보려는 것

 

- 《문파》 2022년 가을호

 

 


 

 

박완호 시인 / 급훈 뒤집기

 

 

급훈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

숙여서 발을 보지 말라.

 

당연하다는 듯 누구에게나

별을 보라고, 별만 보라고

서로 얼마나 다그쳐왔던가?

 

되려 이제는 고개 숙여 발을 보라고,

 

제 발에 뭐가 묻었는지

어디를 무엇을 밟아가며

여기까지 걸어왔는지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때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든 제대로 가기 위해선

별을 올려보듯 발을 봐야 하리

 

고개 숙여 제 발을 보는 사람만이

마음속에 뜨거운 별을 마주치게 되리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계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안의 흔들림』(시와시학사, 1999)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천년의시작, 2003) 그리고 『아내의 문신』(문학의전당, 2008)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너무 많은 당신』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등. 현재 '풍생고등학교'국어 교사. 한국시인협회 회원. 2014. 시와시학상 펠로우시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