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 시인 / 겨울강
강은 얼음을 지치던 아이 하나를 통째로 삼킨다
꼭 다문 입 얼음은 장벽처럼 두껍다 되새김으로 깊어지는 강
강은 아직도 아이를 먹고 있나 다물고 있지만 속으로 달게 우물거린다
얼음 밑 아이 얼굴의 잉어 아이 얼굴의 가물치 아이 얼굴의 모래무지 아이 얼굴의 세모래 강물, 강물
고영민 시인 /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한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현 시인 / 새 길 외 2편 (0) | 2023.01.07 |
---|---|
정윤서 시인 / 옥합을 깨뜨린 이브 (0) | 2023.01.07 |
박해림 시인 / 달의 전설 외 1편 (0) | 2023.01.07 |
강나루 시인 / 그늘에서 그늘 사이 (0) | 2023.01.07 |
최은여 시인 / 점심시간 (0) | 2023.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