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철 시인 / 누이의 방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갔다가 아내가 0이 너무 많이 달린 옷을 집으며 나를 힐끗하기에 어떻게 우리 형편에 그렇게 배짱이 좋으냐고 쏘아붙이고는 휙 나와 찬바람 속을 걷는데 여동생의 얼굴이 몇 십 개의 동그라미로 어른거린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세금이 올랐는데 빌릴 데가 없다며 0을 모두 말하지 못하고 두 장을 얘기하기에 내가 이천이냐고 물으니 깜짝 놀라며 0을 하나 빼고 다섯 장이 올랐는데 어떻게 두 장 안 되겠느냐고 하던 누이 0을 하나 더 빼고 보냈더니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한 누이 어머니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 누이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팔십만 원짜리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누이 아내는 저만치 까맣고 조그만 0을 달고 하나짜리 0을 달고 수많은 0들 사이로 뒤따라온다. 둘이서 말없이 지하철을 타는데 그날따라 지하철은 왜 그렇게 롤러코스터인지. 앞자리에 앉은 까만 0들은 또 얼마나 무참히도 찌그러져 있는지. 오빠, 물속에서 누가 오래 참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 백만 원이다!
전기철 시인 / 앵무鸚鵡
내 꿈은 오렌지다. 나는 앵무를 유목한다. 앵무는 돌림노래로 언덕을 세우고 구릉을 따라 숲을 짓는다. 늦핀 꽃들의 소란이 벙근다. 꽃무늬 잠옷을 입은 암소는 플라스틱 풀을 뜯으며 오렌지 나비를 날려 보낸다. 빨간 나비 파란 나비 초록 나비 들. 나비의 뼈들이 바리작거리며 공중으로 튄다.
플라스틱 소녀가 삐이, 삐이, 치맛귀를 입에 물고, 꿈의 색깔을 바꿔 주세요, 눈을 찡긋 한다. 나는 삐이 삐이, 나비 꿈을 꾼다. 훠이 훠이 훠이, 꿈길을 내는 지전이 날린다.
보얗 보얗, 달의 발자국소리
꿈을 꾸듯이 오렌지를 깐다. 나비를 물고 숲을 색칠하는 앵무, 앵무, 플라스틱 소녀의 향기 없는 웃음이다. 가을꽃 같은, 저승꽃 같은, 키득거리는 그림자 같은 몽상들
오렌지의 눈 깜박임에 소녀의 머리핀이 떤다. 나는 잠의 지평선을 헤맨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덕주 시인 / 오! 양심 외 1편 (0) | 2023.02.03 |
---|---|
김화순 시인 / 구름출판사 외 1편 (0) | 2023.02.03 |
정희성 시인 / 민지의 꽃 외 1편 (0) | 2023.02.03 |
김개미 시인 / 재의 자장가 외 1편 (0) | 2023.02.03 |
이근배 시인 / 들 꽃 외 1편 (0) | 2023.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