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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경무 시인 / 조방앞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1.

류경무 시인 / 조방앞

 

 

고모들은 조방앞에서 다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이 정류장은 깊은 소(沼)처럼 고모들을 삼켰습니다 그 조방앞이 이 조방앞이 아니라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여기만 오면 나는 자꾸 넘어집니다 고모야 고모야 오버로크 고모야 핏물 새나가지 않게 바람 들지 않게 제발 날 좀 예쁘게 꿰매줘, 나는 배 밖으로 삐죽이 나온 바늘을 억지로 밀어넣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방앞은 조방앞, 고모들 때문에 무릎병이 또 도지려 합니다 나는 조방앞에 앉아서 구름과자를 한입 베어먹습니다 고모들 후르르 흩어집니다

 

* 조방앞 : 부산 동구의 옛 조선방직 앞 버스 정류장.

 

 


 

 

류경무 시인 / 팬지

 

 

비를 기다리며 팬지를 심었지 흙의 자물쇠를 따고

나는 팬지를 거기로 돌려보내지

 

팬지는 위로만 꽃, 아래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지

나는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었지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나는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지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참 좋은 어딘가로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

 

팬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네

하나둘 팔랑거리며 팬지는 내 손을 떠나갔네

 

 


 

류경무(柳景茂) 시인

1966년 부산 동래 출생. 1999년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 첫 시집 <양이나 말처럼>. 현재 대구.경북 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