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숙 시인 / 박주가리
누구든 주머니를 뒤집을 때가 있다는 듯 공중에 주머니 하나 털리고 있다
세상에 없던 것들 주머니 안에서 자라나고 생겨난다 나는 그것을 줄탁의 건망증이라 부른다 빨래의 뒤 끝 풀풀 날리던 종이의 보풀 같다
꽃을 떨구는 순간, 박주가리는 닫힌다 언제 어느 틈으로 들어갔는지 손톱이 있는 계절이 되어서야 빼내어 보는 속 넣은 기억은 없는데 꺼낸 기억만 있다
넌 나를 기억할까
안부 좀 물어보면 어때서… 바짝 마른 안절부절 같은 내용물들이 문을 열고 나온다 박주가리에서 바람보다 가벼운 여행이 나온다
안착지(安着地)가 보풀에 달라붙고 있다 들판의 풀밭에 총상의 잎겨드랑이가 팔을 흔들던 여름
꼭 자기가 오른 만큼의 높이에서 날아가는 주머니 속 내용물들 연보라색 단추도 떨어지고 닫혔던 문
공중에 마른 주머니 하나가 텅 비어있다 들판의 바람이 쌀쌀하게 여무는 제 씨앗을 키우고 있다 따뜻한 봄에 서로 만날 것이다
우리도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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