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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변종태 시인 / 상상금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12.

변종태 시인 / 상상금지

 

 

봄과 여름 사이 하얗게 그려진 횡단보도

중간중간 씨앗이었을, 새싹이었을, 꽃잎이었을,

무늬가 새겨져 있다. 스키드마크가

그려진 지점의 끝에 떨어진 꽃봉오리

아직 피지 않은 계절이 뒹굴고 있다.

중학교 일학년이라던 경아,

봉오리처럼 입을 다문 채 횡단보도에 떨어진,

아니, 상상하지 말자.

봄에 피어나 여름을 건너 가을이면 튼실한 씨방에

열매를 맺을 꽃이라 생각하자.

횡단보도에서, 아니 꽃샘바람에

봉오리째 떨어졌다는 상상은 하지 말자, 이건

아니다, 아니다, 상상하지 말자.

시(詩)에서라고 어린 목숨 죽이는, 죽는 상상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너무나 현실적이니까

떨어진 봉오리 꽃잎일 뿐이라고

상상이라고, 상상일 뿐이라고 부정해 봐도

아직 피지 않은 채 떨어진

저 순정한 봉오리.

 

 


 

 

변종태 시인 / 花르륵

 

 

꽃이었으나, 지는 찰나였지

 

바람이겠지 떠나간 인연이었거나

 

스치는 길고양이의 수염 끝에 매달린

 

세 번의 겨울이 신호등으로 서있다

 

건너야 할 기회를 놓치고 기다리기를 다시

 

다섯 번의 여름이 꺼졌다가 켜지곤 했다

 

가지였으니, 가는 길마다 휘어졌겠지

 

물이었으니, 떠내려갈 운명이었지

 

자동차들 쌩쌩 지나가는 찰나의 사거리에서

 

꽃은 피고 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화르륵,

 

오다가 가다가 멈춰버린 철로 위 기차처럼

 

 


 

변종태 시인

1963년 제주에서 출생. 제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 『안티를 위하여』 『미친 닭을 위한 변명』등이 있음. 논문 『미당 서정주의 초기시 연구-화자,화제,초점을 중심으로 』 현재 제주문인협회 회원이며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계간문예 『다층』 편집주간. 여자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