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영 시인 / 아버지
인류 역사에 끼워 기록할 수 없는 왕이여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못하는 활자를 밟지 못하는 벽을 향한 인고(忍苦) 긴 인고의 생애
평양-동경-만주-난징-상해 프랑스조계-부산-서울 변두리
육남매 이름에 세월 새기고 세월 삭이고 커다란 독에 모래·자갈·숯 모래·자갈·숯을 켜켜이 깔고 정수를 마시게 하던 아버지 쌀 아니면 차조밥 냉수 아니면 더한 정신력으로 콩 한 알을 나누라 못질하시던
극빈한 정의(正義)는 극빈한 가난을 부르고 지극히 찬란한 이상(理想)은 높이 떠 있는 애드벌룬 늘 주는 바보늘 지는 바보아버지
해지려는 흰 교복에 반창고를 붙여주던 저린 미소는, 가난을 연습하라 길에서 먹지 말라 주머니에 손 넣지 말라시던 디오게네스의 당당함으로 내일 아침 빈손이어도 빈자에게 주는 빈자의 손길,
나는 아홉에 하나 더 채우려는 걸음인데,
구름아 비켜주라 이제 아버지의 길로 가리 그가 누리던 태양을 누리리
-시집 『우리가 퇴장하면 강남이 강남일까』 2016
이귀영 시인 / 그린마일 -달팽이
어떤 일상의 일상 늘 마지막 날 늘 최고의 날 눈이 가는 만큼 누구의 구둣발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을 지고 산다. 천년의 무게를 지고 풀잎에 잠깐 풀칼에 잠깐 멈추어 속살로 산다. 한 닢의 지구 뒤에 숨어 쇼생크 감옥 장기수들처럼 나는 결백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어떤 비오는 날, 어떤 개화, 어떤 눈물, 어떤 만남… 어떤 모든 순간은 이별의 절정 나는 천천히 천천히 속살을 다 끄집어내어 모든 은유를 핥으며 흔적을 지우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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