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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귀영 시인 / 아버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13.

이귀영 시인 / 아버지

 

 

인류 역사에 끼워 기록할 수 없는 왕이여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못하는 활자를 밟지 못하는

벽을 향한 인고(忍苦) 긴 인고의 생애

 

평양-동경-만주-난징-상해 프랑스조계-부산-서울 변두리

 

육남매 이름에 세월 새기고 세월 삭이고

커다란 독에 모래·자갈·숯 모래·자갈·숯을 켜켜이 깔고

정수를 마시게 하던 아버지

쌀 아니면 차조밥 냉수 아니면 더한 정신력으로

콩 한 알을 나누라 못질하시던

 

극빈한 정의(正義)는 극빈한 가난을 부르고

지극히 찬란한 이상(理想)은 높이 떠 있는 애드벌룬

늘 주는 바보늘 지는 바보아버지

 

해지려는 흰 교복에 반창고를 붙여주던 저린 미소는,

가난을 연습하라 길에서 먹지 말라 주머니에 손 넣지 말라시던

디오게네스의 당당함으로

내일 아침 빈손이어도 빈자에게 주는 빈자의 손길,

 

나는 아홉에 하나 더 채우려는 걸음인데,

 

구름아 비켜주라 이제 아버지의 길로 가리

그가 누리던 태양을 누리리

 

-시집 『우리가 퇴장하면 강남이 강남일까』 2016

 

 


 

 

이귀영 시인 / 그린마일

-달팽이

 

 

어떤 일상의 일상

늘 마지막 날 늘 최고의 날 눈이 가는 만큼

누구의 구둣발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을 지고 산다.

천년의 무게를 지고 풀잎에 잠깐 풀칼에 잠깐 멈추어 속살로 산다.

한 닢의 지구 뒤에 숨어 쇼생크 감옥 장기수들처럼

나는 결백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어떤 비오는 날, 어떤 개화, 어떤 눈물, 어떤 만남…

어떤 모든 순간은 이별의 절정

나는 천천히 천천히 속살을 다 끄집어내어

모든 은유를 핥으며 흔적을 지우며 간다.

 

 


 

이귀영 시인

부산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8년 《현대시》로 등단. 현재 〈내일의 시〉 동인. 시집으로 『달리의 눈물』 『그린마일』 『우리가 퇴장하면 강남이 강남일까』가 있음. 제3회 현대시 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