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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경희 시인 / 천은사 가는 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5.

홍경희 시인 / 천은사 가는 길

 

 

앳된 구월의 얼굴

쑥부쟁이가 산그늘에 앉아

만삭의 몸을 푼다

 

백팔번뇌에 절여진 내 발자국 소리에

균열을 내는 계곡의 적요,

푸른 발가락도 담글 수 없다

 

몸속의 무성한 악의 혀를

수심교에 걸어놓고

돌아가는 마음, 풀섶처럼

가볍다

 

골짜기가 깨어난다

뒹굴던 돌들도

나도 깨어난다

 

여기는 물도 독경을 한다

 

 


 

 

홍경희 시인 / 삿뽀로행 기차가 길을 잃은 까닭

 

 

대설경보가

혼슈의 서해북부와 동북지역을 점령했다.

모리오카를 지나면서 눈발은 더 시퍼렇다

눈이 교통 표지판까지도 먹어버린 오후,

기차는 아오모리의 울창한 숲을 횡단한다

 

눈보라가 뱀눈처럼 날린다

푸른 욕망을 꿈꾸며 한 사내도 퓨마처럼 달린다

봄이 실종된 침묵,

흔들리던 꿈이 또 흔들린다

침묵은

동행하는 사람들의 목을 조인다

 

새는 날면서 비우기 한다

그가 내장을 비우지 않는다면

삿뽀로로 가는 기차는 길을 잃을 것만 같다

 

 


 

홍경희 시인

2014년 《시인정신》으로 등단. <시인광장> 여름호 신인상. 시집『기억의 0번 출구』. 강원현대시문학회. 시림회원. 시산맥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