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희 시인 / 천은사 가는 길
앳된 구월의 얼굴 쑥부쟁이가 산그늘에 앉아 만삭의 몸을 푼다
백팔번뇌에 절여진 내 발자국 소리에 균열을 내는 계곡의 적요, 푸른 발가락도 담글 수 없다
몸속의 무성한 악의 혀를 수심교에 걸어놓고 돌아가는 마음, 풀섶처럼 가볍다
골짜기가 깨어난다 뒹굴던 돌들도 나도 깨어난다
여기는 물도 독경을 한다
홍경희 시인 / 삿뽀로행 기차가 길을 잃은 까닭
대설경보가 혼슈의 서해북부와 동북지역을 점령했다. 모리오카를 지나면서 눈발은 더 시퍼렇다 눈이 교통 표지판까지도 먹어버린 오후, 기차는 아오모리의 울창한 숲을 횡단한다
눈보라가 뱀눈처럼 날린다 푸른 욕망을 꿈꾸며 한 사내도 퓨마처럼 달린다 봄이 실종된 침묵, 흔들리던 꿈이 또 흔들린다 침묵은 동행하는 사람들의 목을 조인다
새는 날면서 비우기 한다 그가 내장을 비우지 않는다면 삿뽀로로 가는 기차는 길을 잃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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