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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순섭 시인 / 유리새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5.

최순섭 시인 / 유리새

​​

 

시시 때때 변하는 맑고 투명한 그림 누가 그려 놓았을가

새들이 허공을 날고 높은 건축물 유리창에 노을이 번지고 있다

강물이 흘러가고 지평의 끝에 물드는 고향은 금빛 바다

구만리 대칭으로 서있다

 

달이 연주하는 파도는 밀려왔다 밀려가고 드믄드믄 낮은 산이 숲을 이루고

자작나무 잔가지가 흔들거려 눈이 부시다 눈이 맑은 새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번갈아 바라보며 거리를 가늠하고 내려앉을 곳을 찾고 있다

 

새들은 맑은 허공을 거침없이 날아가지

눈이 맑은 새는 영혼의 무게만큼 깃을 뽑아 흔적을 남기고

맑은 영혼을 물고 거침없이 날아가지

하늘로 맑은 하늘로 날아가 가여운 영혼들의 소식을 전 한다

 

가을 하늘은 맑아서 거침이 없다 구만리 날아가 안도의 숨을 나누고 새들은

영혼이 맑아 우뚝 솟은 빌딩 속 구름을 믿고 숲을 믿고 바다를 믿고

아니아니 세상을 믿고 힘차게 뛰어드는 거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져 대칭으로 서있는 맑은 세상을 믿으며

눈이 맑은 새는 대칭으로 날아가 수직이동을 하고

허우적허우적 보이지 않는 맑은 숲으로 뛰어들지

 

유리창 속으로 힘차게 뛰어들어 수직이동을 하는 거다

함께 뛰어든 새들이 떨어져 죽어갈 때 안과 밖의 경계는 허물어져

맑은 세상에는 숲도 구름도 고향의 금빛 바다도 사라지고 없다

눈이 맑은 새는 울음도 해맑아 유리알 구르는 소리로 운다.

시집 『플라스틱 인간』 (황금알, 2022) 수록​


 

 

최순섭 시인 / 새 주소

 

 

언제부턴가 번지가 길로 바뀌었다

 

한 평도 안 되는 옛 번지에 살다

본향 찾아 새 주소로 이사 가신 분들은 어찌 살고 계실까

 

그 넓은 하늘길에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이 함께 뒷짐 지고 산책하고 계셨다

 

이따금 폭포수 흘러넘치는 은하 길

한 귀 포장마차에는 천상병 시인과 중광 스님이 마주 앉아 깔깔깔 대폿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옛 번지가 그리우신지 모두

땅 아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계시다

 

 


 

 

최순섭 시인 / 환청

 

 

온종일 헬기에서 터지는

확성기 소리에 밤이 오고

함성도 멈춘 적막한 거리

검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한 발의 총성에 쫓기다 어느 상가 이 층 주방에 숨어들어

네온등도 꺼진 캄캄한 밤

길 건너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크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데

한 뼘 부식 창고 속에 웅크려 앉아

숨을 멈추고 한 청년이 죽은 그날

군홧발 소리는 사십 년이 지나도록 들려오고 있다

저벅저벅 금남로의 고요를 짓밟고 다가오는

군홧발 소리에

새벽 저승 문을 넘나드는 나는

날마다 뭉크의 절규하는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두 귀를 틀어막는다.

 

 


 

 

최순섭 시인 / 민들레 활을 쏘다

 

 

자드락길

참꽃들 속에서 봤어

고개 드는 홀씨, 그대

당당히 얼굴 내밀고

따스한 햇살 팽팽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어

훅, 바람 불자

쓩쓩 날아가는 화살촉

번뜩거리는 칼날이 심장을 찢는 문장을 봤어

휘청 사라지는 우주

블랙홀을 봤어

 

 


 

 

최순섭 시인 / 하얀 대화

 

 

 총부리에 화약 연기 하얗게 피어오르던 쑥대밭 화살머리

 ‘자, 십 분간 휴식’

 한순간 평화가 찾아왔다

 푸~ 푸~ ‘프랑스 병사 벨기에 병사들이 와 여기 묻혀 있노’

 눈시울 글썽이며 먼 하늘 바라보는데

 푸~ 푸~ 하얀 마스크 쓰고 땅을 헤집던 유해 발굴 남북 병사가

 씩 웃으며 건네는 담배 한 까치

 푸~ 푸~ 내뿜던 연기 속에 사라진 70년, 지하에서 김일성이 일어나 ‘북남이 서로 잘 지내는구나’라고 말할까 박정희가 살아나 ‘남북이 사이좋게 정말 잘 사는구나’하고 말할까 죽은 병사들이 벌떡 일어나 푸~ 푸~ ‘여직 그 모양이냐 요요 철없는 놈들’ 호통치며 손가락질하는 격전지 남과 북의 병사, 미군병사, 중국병사, 고향 소식 모르는 프랑스 병사, 벨기에 병사, 이국의 수많은 병사들이 망초 꽃으로 하얗게 피고 있다

 이 땅에 무엇이 더 남았을까

 땅을 헤집고 나온 초록 옷의 하얀 얼굴들

 서로 다른 하늘 바라보며

 푸~ 푸~ 하얀 평화를 내뿜고 있다.

 

 


 

 

최순섭 시인 / 낙엽

 

 

 초겨울, 부음을 받고 잠시 후 영구차가 지나갔다.

 

한때 푸르렀던 이파리들의 시신이 이리저리 뒹굴고 강렬한 키스의 밤, 한적한 골목 가로 등 빛에 서 있던 여인의 혀는 송곳이 되어 살을 후비고, 붉은 빛깔의 황홀한 벌독이 번져온다. 한 사내가 흔들리는 아주 좁은 공간에서 낙엽을 쓸며 한 잎 한 잎 젖은 속옷을 들춰본다. 언제부터 여인의 자궁 속에서 우윳빛 향기가 난 걸까. 탯줄이 끊어지고 비로소 행성은 궤도를 이탈한다. 시신을 끌어안고 숨이 뜨거운 나무들은 아궁이가 벌겋다. 젖은 장작이 불붙는 소리에 세상은 요동치고 거친 숨소리에 푸른 생명이 눈 뜨고 있다.

 

 푸르게 붉게 노랗게…,

 빛을 잃고 사라져 가는 건 모두 뜨겁다.

 

 


 

최순섭 시인

1956년 대전광역시에서 출생. 1978년 『시밭』 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2007년 《작가연대》 등단. 시집으로 『말똥,말똥』 『플라스틱 인간』 등이 있다. 현재 환경신문 에코데일리 문화부장, 이화여대, 동국대 평생교육원 출강, 한국가톨릭독서아카데미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