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인 /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는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박준 시인 / 삼월의 나무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
겨울 무를 꺼내 그릇 하나에는 어슷하게 썰어 담고
다른 그릇에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를 조금 뿌렸다
밥상에는 다른 반찬인 양 올릴 것이다
내가 아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에 있다
밀어도 열리고 당겨도 열리는 문이 늘 반갑다
저녁밥을 남겨 새벽으로 보낸다
멀리 자라고 있을 나의 나무에게도 살가운 마음을 보낸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뜻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 있겠습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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