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숙 시인 / 봄날의 자전거
해묵은 숙제에 싹이 돋네요
나를 양보하느라 정작 내 시간을 사지 못했던 날들, 깊숙이 감춰둔 용기와 멀어지는 나를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넣어둔 설렘 하나 귀퉁이가 다 닳았어요
샛노란 두려움을 안장에 태우면 꼭 붙들어 줄 듬직한 손이 필요한데 때마침
누군가 부드러운 봄의 시간을 내놓았네요 당근마켓에 그것, 내가 살게요 당근인 걸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꿈이 운동장을 끌어당겨요 두 개의 바퀴가 굴러옵니다
비틀대는 꽁무니를 단단히 붙들어주는 당신의 손은 봄처럼 따뜻해요 햇살이 산수유 꽃대를 세우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면 개나리 울타리처럼 타다탁, 꽃망울을 터뜨릴 수 있을까요
붙잡은 손 놓은 줄도 모르고 봄의 바퀴가 한참을 굴러가고 있어요
꽃들도 빈 가지 위를 두발자전거로 달리고 있습니다.
홍계숙 시인 / 기울어가는 부양
시골 빈집이 할머니를 부양해요 세간살이 뼈들이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기울어가는 부양 가끔 앞산에서 날아오는 뻐꾸기소리가 업둥이 딸처럼 다녀가요 쪽마루에 앉아 맛보는 봄볕은 달달한 간식이에요 자고 나면 조금 더 기울어진 흙벽 안쪽에서 할머니는 헐거운 세간이 되어가요 가까스로 빈집에서 벗어난 집은 사람을 놓칠까 걱정이 많아 새벽 일찍 방문을 열어보지요 빈집의 적막은 죽음과도 같은 무게니까요 휑한 시골집에서 느슨한 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세끼 밥 때에요 양은냄비 하나가 먼저 간 아들처럼 살가워요 외로움도 넣고 미움도 끓여 먹으면 오래 비어있는 컴컴한 구석을 채울 수 있어요 그토록 마음 기울인 자식들은 어느 쪽으로 기울었을까요 텃밭에 심으면 파릇한 안부가 돋을 거라며 주름진 시간이 호미를 쥐어주네요 빈집이 조였던 관절을 풀어 할머니와 기울기를 맞추곤 해요 오늘은 봄바람이 살가운 부양을 하겠다고 한나절 빨랫줄을 흔들다 갔어요 남은 살과 뼈를 빈집에게 나누어주며 할머니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새하 시인 / 밧줄 외 1편 (0) | 2023.04.07 |
---|---|
신지혜 시인 / 꽃들의 진화 외 3편 (0) | 2023.04.07 |
정미소 시인 / 춤추는 새 외 1편 (0) | 2023.04.06 |
문현숙 시인 / 바람의 수화(手話) 외 1편 (0) | 2023.04.06 |
권위상 시인 / 사라진 봄 외 1편 (0) | 2023.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