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 시인 / 꽃들의 진화 뜰에 뿌린 제라늄꽃씨가 어느 날 예서제서 얼굴들 뾰족이 내밀더니 그늘 한 장씩 거느린 채 도도하다
꽃들은 지구별 위에서 가장 맹렬하다 천둥 번개 치는 날에도 꽃들은 터진다 안개 자욱해도 꽃잎에 꽃술을 단다
꽃들은 영악스럽고 당차다 너풀거리는 그들 얼굴 들여다보면 무섭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이 땅을 읽어갔을까 이 세상의 명암을 알아버린 후, 꽃들은 향기를 풀어 한 계절을 포박했다 그리고 꿀벌과 나비 떼 부르고 바람 불러 그들 존재를 널리 알렸다 소문이 번져 절벽 끝 무명초나 사막 선인장까지 그 소식 알아들었고, 열려있는 모든 귀가 알아듣고 함께 동조했다
꽃의 집단은 입을 모아 말한다 모래 위에, 바람 속에, 안개 속에서도 우린 끝까지 쟁취해요. 거저 된 것 아무것도 없어요 내 얼굴화장과 독특한 향기 위해 때때로 공기의 빙벽에 무수히 갈비뼈를 찧으며 파란만장했습니다. 우리 꽃빛은 저마다 그 고통의 빛깔입니다
그의 얼굴인 꽃잎 속 암술수술들 보존키 위한 특이한 디자인은 그들만의 대물림 유전인자를 고초 끝에 진화시킨 결과이다
우린 꽃들에게 열광한다 갈채 보내며, 꽃 앞에서 V자를 그린다 그럼에도 꽃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래에 이 지구 전체를 점령하고 우월한 종이라는 정복자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부로 삶을 집적대거나 꺾어대는 오만방자한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싶은 것이다
신지혜 시인 / 우주 모둠탕이 펄펄 끓는다
우주 모둠탕을 끓인다
한 가마솥에 산을 숭숭 썰어 넣고 바다를 바가지로 넉넉히 쏟아붓고 모둠탕 펄펄 끓인다 붉은 것, 푸른 것, 뾰족한 것, 파, 마늘, 깨소금, 후추 온갖 양념 다져 집어넣고 걸쭉하게 끓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도 다듬을 필요 없이 통째 집어넣고 끓인다 귀하다 천하다 더럽다 깨끗하다도 없이
잘 익고 있느냐, 산천아 새야 물고기야
한 솥 안에서 뭉게뭉게 솟구치는 물질의 냄새 썩은 내 단내 맛없다 맛있다 할 것도 없이 보약이다 독약이다 할 것도 없이 푹 익힌다
인간이란 오만의 뼈도 무명벌레의 슬픔과 한데 뭉크러져 잘 끓고 있다
끓어라!
끓어야만 돌아가는 막무가내 우주 시스템 억겁 이전에도 끓었고 억겁 이후에도 펄펄 끓고 있을 이 가마솥 속에서 미완의 고장 난 퍼포먼스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여긴 오직 끓어야만 살 수 있는 곳이다
- 『문학과 창작』 2017년 겨울호
신지혜 시인 / 풍경을 치다
포크너 산속 어느 허름한 집 처마끝 매달린 풍경 하나가 요란합니다 어디서 온 바람인지, 전할 말 있다는 듯 뎅뎅 종을 칩니다 어찌나 그 음의 소릿결 파문 허공에 오래오래 번지는지 박차오르는 풀숲의 새떼도 소리결따라 밀려가며 번집니다. 빽빽한 골짜기 나무들 일제히 한쪽으로 고개 숙이고 머리칼 정갈하게 빗겨 번지는데 바위틈 그늘 밑 잡초들도 귓바퀴 둥글게 열어 번지며 꽃들은 나무들에게 나무들은 달에게 달은 별들에게 천지사방 소릿결 전합니다
산 아래 아득히 납작 엎드린 마을지붕들 힘들지, 일일이 머리 쓰다듬으며 따뜻한 파문이 번집니다
먼저 출발한 둥근 파문의 고리 위로 뒤에 출발한 둥근 고리가 정연하게 뒤 따릅니다 어느 고리도 앞서거나 겹쳐지지 않고 제각기 도를 지킵니다.
저편 온 세상 벽을 치고 돌아온 고리들이 다시 어미 종 향해 한 줄 두 줄 되돌아옵니다. 종은 제가 낳았던 모든 소리를 다시 품에 받아 안습니다
나 여기 살며 무심코 툭툭 내놓은 언행의 파문, 천지사방 한 바퀴 두루 돌아 내게 다시 귀환하는 것 풍경소리 듣고 깨닫습니다 삼라만상이 함께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 나 비로소 곰곰 되새깁니다
신지혜 시인 / 아름다운 가문 나는 나의 가문에 프라이드를 갖습니다 아버지는 중앙시장에서 리어카 끌며 야채 팔아 나를 키웠습니다 타인 속이는 걸 가장 두려워했던 아버지는 마진 없이 장사하였으며 저녁이면 파 썩는 냄새 막걸리 냄새 코를 쥐었으나 전대 속에선 늘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절랑거렸습니다 어머니는 경동시장에서 옥수수 떼어다 삶아 머리에 이고 가가호호 골목골목 누볐습니다 목숨 내놓고라도 절대 어둠과 결탁하거나 비굴하지 않아 자존심 강한 어머니는 늘 가난이 괜찮다 하시며 밤새도록 끙끙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할아버지는 외진 골목어귀 굽은 허리로 온종일 구두수선 했습니다 양심과 정직은 돈이나 명예와도 바꿀 수 없다고 성품이 늘 대쪽같이 꼿꼿하고 강직한 할아버지 그렇게 평생 세상 가난 한 잎 한 잎 모아, 가훈처럼 마루 밑에 돈 항아리 묻어놓고 훌훌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전국팔도 선남선녀 짝지어주고 사람으로 왔으니 꼭 사람답게 사랑하며 살라고 서로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안 된다고 꼭 한 말씀씩 꼭꼭 쥐여주고 옷이나 쌀 받아왔습니다 이분들 모두 자기 생 최선 다했으며 타인 가슴에 못 치는 일 없이 선하게 사셨습니다 경전 읽은 적 단 한 번도 없으나 이 세상 팔만대장경 한복판 정도를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나 이분들 닦아놓은 토대 위 태어나 단 한 번도 내 조상님들 욕되게 한 적 없습니다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늘 내 든든한 후원자 되시며 나를 프라이드로 알고 계신 분들이십니다 내 가문은 참말 아름다운 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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