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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지혜 시인 / 꽃들의 진화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7.

신지혜 시인 / 꽃들의 진화

​​

뜰에 뿌린 제라늄꽃씨가

어느 날 예서제서 얼굴들 뾰족이 내밀더니

그늘 한 장씩 거느린 채 도도하다

 

꽃들은 지구별 위에서 가장 맹렬하다

천둥 번개 치는 날에도 꽃들은 터진다

안개 자욱해도 꽃잎에 꽃술을 단다

 

꽃들은 영악스럽고 당차다 너풀거리는 그들 얼굴

들여다보면 무섭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이 땅을 읽어갔을까

이 세상의 명암을 알아버린 후, 꽃들은

향기를 풀어 한 계절을 포박했다 그리고

꿀벌과 나비 떼 부르고

바람 불러 그들 존재를 널리 알렸다

소문이 번져 절벽 끝 무명초나 사막 선인장까지

그 소식 알아들었고, 열려있는 모든 귀가 알아듣고 함께 동조했다

 

꽃의 집단은 입을 모아 말한다

모래 위에, 바람 속에, 안개 속에서도 우린

끝까지 쟁취해요. 거저 된 것 아무것도 없어요

내 얼굴화장과 독특한 향기 위해 때때로 공기의 빙벽에

무수히 갈비뼈를 찧으며 파란만장했습니다.

우리 꽃빛은 저마다 그 고통의 빛깔입니다

 

그의 얼굴인 꽃잎 속 암술수술들 보존키 위한

특이한 디자인은 그들만의 대물림 유전인자를 고초 끝에

진화시킨 결과이다

 

우린 꽃들에게 열광한다 갈채 보내며, 꽃 앞에서 V자를 그린다

그럼에도 꽃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래에

이 지구 전체를 점령하고 우월한 종이라는 정복자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부로 삶을 집적대거나 꺾어대는

오만방자한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싶은 것이다

 

 


 

 

신지혜 시인 / 우주 모둠탕이 펄펄 끓는다

 

우주 모둠탕을 끓인다

 

한 가마솥에 산을 숭숭 썰어 넣고

바다를 바가지로 넉넉히 쏟아붓고 모둠탕 펄펄 끓인다

붉은 것, 푸른 것, 뾰족한 것,

파, 마늘, 깨소금, 후추

온갖 양념 다져 집어넣고

걸쭉하게 끓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도 다듬을 필요 없이 통째 집어넣고 끓인다

귀하다 천하다 더럽다 깨끗하다도 없이

 

잘 익고 있느냐, 산천아 새야 물고기야

 

한 솥 안에서 뭉게뭉게 솟구치는 물질의 냄새

썩은 내 단내 맛없다 맛있다 할 것도 없이

보약이다 독약이다 할 것도 없이 푹 익힌다

 

인간이란 오만의 뼈도 무명벌레의 슬픔과 한데 뭉크러져 잘 끓고 있다

 

끓어라!

 

끓어야만 돌아가는 막무가내 우주 시스템

억겁 이전에도 끓었고 억겁 이후에도 펄펄 끓고 있을 이 가마솥 속에서

미완의 고장 난 퍼포먼스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여긴 오직 끓어야만 살 수 있는 곳이다

 

- 『문학과 창작』 2017년 겨울호

 

 


 

 

신지혜 시인 / 풍경을 치다

 

포크너 산속 어느 허름한 집

처마끝 매달린 풍경 하나가 요란합니다

어디서 온 바람인지, 전할 말 있다는 듯 뎅뎅 종을 칩니다

어찌나 그 음의 소릿결 파문

허공에

오래오래 번지는지

박차오르는 풀숲의 새떼도 소리결따라 밀려가며 번집니다.

빽빽한 골짜기 나무들 일제히 한쪽으로 고개 숙이고

머리칼 정갈하게 빗겨 번지는데

바위틈 그늘 밑 잡초들도 귓바퀴 둥글게 열어 번지며

꽃들은 나무들에게

나무들은 달에게

달은 별들에게 천지사방 소릿결 전합니다

 

산 아래 아득히 납작 엎드린 마을지붕들

힘들지, 일일이 머리 쓰다듬으며

따뜻한 파문이 번집니다

 

먼저 출발한 둥근 파문의 고리 위로 뒤에 출발한 둥근 고리가

정연하게 뒤 따릅니다 어느 고리도 앞서거나 겹쳐지지 않고

제각기 도를 지킵니다.

 

저편 온 세상 벽을 치고 돌아온 고리들이

다시 어미 종 향해 한 줄 두 줄 되돌아옵니다.

종은 제가 낳았던 모든 소리를 다시 품에 받아 안습니다

 

나 여기 살며 무심코 툭툭 내놓은 언행의 파문,

천지사방 한 바퀴 두루 돌아 내게 다시 귀환하는 것

풍경소리 듣고 깨닫습니다

삼라만상이 함께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

나 비로소 곰곰 되새깁니다

 

 


 

 

신지혜 시인 / 아름다운 가문

나는 나의 가문에 프라이드를 갖습니다

아버지는 중앙시장에서 리어카 끌며 야채 팔아 나를 키웠습니다

타인 속이는 걸 가장 두려워했던 아버지는

마진 없이 장사하였으며 저녁이면 파 썩는 냄새 막걸리 냄새 코를 쥐었으나

전대 속에선 늘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절랑거렸습니다

어머니는 경동시장에서 옥수수 떼어다 삶아 머리에 이고 가가호호 골목골목

누볐습니다 목숨 내놓고라도 절대 어둠과 결탁하거나 비굴하지 않아

자존심 강한 어머니는 늘 가난이 괜찮다 하시며

밤새도록 끙끙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할아버지는 외진 골목어귀 굽은 허리로 온종일 구두수선 했습니다

양심과 정직은 돈이나 명예와도 바꿀 수 없다고

성품이 늘 대쪽같이 꼿꼿하고 강직한 할아버지 그렇게

평생 세상 가난 한 잎 한 잎 모아, 가훈처럼 마루 밑에

돈 항아리 묻어놓고 훌훌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전국팔도 선남선녀 짝지어주고

사람으로 왔으니 꼭 사람답게 사랑하며 살라고

서로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안 된다고

꼭 한 말씀씩 꼭꼭 쥐여주고 옷이나 쌀 받아왔습니다

이분들 모두 자기 생 최선 다했으며 타인 가슴에

못 치는 일 없이 선하게 사셨습니다

경전 읽은 적 단 한 번도 없으나

이 세상 팔만대장경 한복판 정도를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나 이분들 닦아놓은 토대 위 태어나

단 한 번도 내 조상님들 욕되게 한 적 없습니다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늘

내 든든한 후원자 되시며 나를 프라이드로 알고 계신 분들이십니다

내 가문은 참말 아름다운 가문입니다

 

 


 

신지혜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02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 『밑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와 『토네이도』가 있음. 《뉴욕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신문》, 《뉴욕일보》, 《뉴욕코리아》, 《LA코리아》, 《월드코리안 뉴스》 및 다수 신문에 좋은시 고정 컬럼 연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지원금 수혜.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최우수상, 미주시인문학상, 윤동주서시해외작가상 등 수상, 현재 뉴욕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