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홍 시인 / 밥무덤
다랭이 마을에 밥무덤이 있다
손바닥만한 논뙈기, 식구들 배불리 먹게 해달라고 해마다 밥무덤에 하얀 쌀밥을 묻는다 무덤이 넙죽 밥을 받아 먹는다
나도 나에게 매일 밥을 올린다 솥무덤에서 지은 밥 숟가락무덤으로 퍼서 나에게 먹인다 내가 무덤이다 무덤이 밥을 먹고 자란다
구멍 속으로 들어간 양식들 다시 세상에 뿌려진다 날 닮은 인간, 얄팍한 지식 내가 싼 똥 다 무덤에서 나왔다
오늘도 집무덤으로 퇴근한다
정연홍 시인 /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시내버스 정거장 한 켠 신기료장수 앉은뱅이 의자 위에 하루의 굽은 등 묶어 두고 상처 난 신발들 꿰매고 있다 때 절은 공구통 연장들이 살아온 날들의 흔적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다 바늘을 뽑아 올리는 부지런한 손길에서 길들의 아픈 부위가 하나씩 아물어 간다 사십년 고단한 얼룩의 날들,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새 길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 튼튼하게 박음질 된 그 길을 따라간
하동 구례 광양 5일장을 따라 평생을 떠돌았을 낡은 구두 누구도 꿰매 주지 않던 그의 상처 난 길들이 이제는 시장 뒷켠으로 밀려나 있다 간간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소문처럼 찾아 주는 이곳 더 이상 꿰맬 길 없는 누더기 인생들이 서성거리는 오일 장터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구멍 난 길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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