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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연홍 시인 / 밥무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7.

정연홍 시인 / 밥무덤

 

 

다랭이 마을에 밥무덤이 있다

 

손바닥만한 논뙈기, 식구들 배불리

먹게 해달라고 해마다

밥무덤에 하얀 쌀밥을 묻는다

무덤이 넙죽 밥을 받아 먹는다

 

나도 나에게 매일 밥을 올린다

솥무덤에서 지은 밥

숟가락무덤으로 퍼서

나에게 먹인다

내가 무덤이다

무덤이 밥을 먹고 자란다

 

구멍 속으로 들어간 양식들

다시 세상에 뿌려진다

날 닮은 인간, 얄팍한 지식

내가 싼 똥

다 무덤에서 나왔다

 

오늘도 집무덤으로 퇴근한다

 

 


 

 

정연홍 시인 /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시내버스 정거장 한 켠 신기료장수

앉은뱅이 의자 위에 하루의 굽은 등 묶어 두고

상처 난 신발들 꿰매고 있다

때 절은 공구통 연장들이

살아온 날들의 흔적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다

바늘을 뽑아 올리는 부지런한 손길에서

길들의 아픈 부위가 하나씩 아물어 간다

사십년 고단한 얼룩의 날들,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새 길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

튼튼하게 박음질 된 그 길을 따라간

 

하동 구례 광양 5일장을 따라

평생을 떠돌았을 낡은 구두

누구도 꿰매 주지 않던 그의 상처 난 길들이

이제는 시장 뒷켠으로 밀려나 있다

간간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소문처럼 찾아 주는 이곳

더 이상 꿰맬 길 없는 누더기 인생들이

서성거리는 오일 장터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구멍 난 길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정연홍 시인

1967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 춘해대 멀티미디어정보과 졸업. 동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05년 《시와 시학》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세상을 박음질하다』 『코르크 왕국』이 있음. 1990년 개천문학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