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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준모 시인 / 주광성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1.

강준모 시인 / 주광성

 

 

망우역 승강장 틈새로 햇살이 들고

사람들이 모인다

수억 광년을 지나 대기권을 통과한

해의 마음은 모나지 않아

그림자들은 해를 찾는다

몸의 뒤편을 비로소 바라다 본다

바닥을 납작 엎드린

그림자는 우울한 나의 직분을 감추고

앞차를 놓쳐 한 칸씩 밀린 시간이 아쉬운 듯

목을 길게 뺀다

사람의 일생을 하나의 색으로 요약한 기법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의 색이다

내면이 무거운 그림자는 땅을 어슬렁거리다

전철이 도착하고

몸들은 다시 그림자를 거둔다

시간의 문은 닫히고

햇살은 플랫폼에 남는다

 

-시집 『오래된 습관』 중에서

 

 


 

 

강준모 시인 / 분리수거를 하면서

 

 

재활용품을 푸대에 분리해서 버린다

 

페트병을 찌그러뜨려 공기는 회수한다희망을 마셨던 소주병을 버린다똥이 되지 못한 미완의 음식을 버린다A4용지에 쓰다 망친 슬픔을 버린다그런데 오랫동안 몸의 그림자였던 옷이 나를 버린다재활용 안된 죽음이 삶을 버리고 있는 중이다언젠간 지구가 나를 버릴 때가 있을 것이다

 

지하실의 어둠이 빛을 버리고 있는 오후이다

 

-시집 <오래된 습관 > 中에서

 

 


 

 

강준모 시인 / 발톱을 깎다

 

 

출근 전에 거실에 앉아 발톱을 깎는다

발톱에는 통각이 없다

나무처럼 끊임없이 자란다

며칠 새 부쩍 자랐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나무

바닥에 이파리처럼 떨어진 시간의 각질들

발이 아침까지 꿈길을 걸어와서는

말 못하는 먹먹함을 내민다

휴지에 하나 둘 모은다

나무가 되지 못하고

살이 기억하고 있는 무통의 저편

창밖으로 가을이 지나간다

나는 살 속에 끈질기게 뿌리 내린

발의 뿔을 본다

 

-시집 <오래된 습관 > 中에서

 

 


 

강준모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및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년 《창작 21》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오래된 습관』 등이 있음. 경희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