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 시인 / 신파
때로는 삼류 쪽으로 에돌아야 인생이 신파스러워 신신파스처럼 욱신욱신 열이 난다 순정을 척 떼어내자 소나기가 내리고 일제히 귓속의 맨홀로 고백이 휘감겨 돌아간다 청춘에서 청춘까지 비릿한 것이 많아서 비밀의 수위에는 밤들이 넘치고 편지들이 떠다닌다 뜨거운 이마에 잠시라도 머물 것 같은 입술, 알싸한 그 접착을 지금도 맹세한다 내내 뜨거울 것, 그리고 내내 얼얼할 것 신파란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을 쏟는 것이므로 누군가 나의 눈으로 너를 본다 오래도록, 우리의 날들이 철 지난 전단지처럼 붙어 있다 아직도, 열이 안다
-시집 『감(感)에 대한 사담들』, 문학동네, 2013년
윤성택 시인 / 막걸리 한 잔
비가 온다는 예보만으로도 인정머리 없는 아스팔트를 찰싹찰싹 때려주는 빗소리가 들리고, 나무들이 푸는 잎사귀 몸내가 맡아진다 주렴처럼 낮게 드리운 구름 아래에서는 왠지 삐딱하게 다리를 꼬아도 되겠다 싶어, 하느님 오늘은 막걸리 한 잔 쨍하실 거죠, 세상 움푹한 곳은 모두 채워질 잔이잖아요 피식, 지평이었다가 서울이었다가 포천인 그 탁한 하늘 희멀건 속내를 휘휘 저어 벌컥 이해해버린다 무슨 말을 해도 빗줄기는 바닥에 이어폰 꽂고 생각을 알아내는 게지, 그렇지 않고는 기분이 비를 흠뻑 맞고와 실실거릴까 취한다는 건 누가 나를 잠시 나의 밖으로 불러내 몸은 쑥맥이야, 귀엣말 해주는 것 그 내통을 알면서도 몸은 매번 나를 위로하곤 한다 그런 내가 안타까워 코를 골아주다가, 마지막까지 나를 가득 채워 놓고 또 한 잔이 된다 내일은 주일이고 모레는 주일에 취해 춘곤한 날 태초에 비부터 뿌려놓고 흙을 주무르신 아귀힘이 여태 나를 둥글려 주시는 걸 느낀다 빗줄기가 띄워 놓은 왕관 무늬 위 딱 한 점 물방울처럼 시간이 정지된 그 활공을, 툭 젓가락으로 집는다 그러니까 저 밖이 수많은 空에 관한 매혹이라고 기분부터 마중 나가 보는 밤
- 『딩아돌하』 2018년 여름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반달 시인(뽈강) / 홀몬전서 54장 외 4편 (0) | 2023.04.14 |
---|---|
김봉식 시인 / 기묘한 시 외 1편 (0) | 2023.04.14 |
이문숙 시인 / 치매학교 외 14편 (0) | 2023.04.13 |
신두호 시인 / 안개 속의 뇌 외 1편 (0) | 2023.04.13 |
김선용 시인 / 달과 소년 외 1편 (0) | 2023.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