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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성택 시인 / 신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3.

윤성택 시인 / 신파

 

 

때로는 삼류 쪽으로 에돌아야 인생이 신파스러워

신신파스처럼 욱신욱신 열이 난다

순정을 척 떼어내자 소나기가 내리고

일제히 귓속의 맨홀로 고백이 휘감겨 돌아간다

청춘에서 청춘까지 비릿한 것이 많아서

비밀의 수위에는 밤들이 넘치고 편지들이 떠다닌다

뜨거운 이마에 잠시라도 머물 것 같은 입술,

알싸한 그 접착을 지금도 맹세한다

내내 뜨거울 것, 그리고 내내 얼얼할 것

신파란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을 쏟는 것이므로

누군가 나의 눈으로 너를 본다 오래도록,

우리의 날들이 철 지난 전단지처럼 붙어 있다

아직도, 열이 안다

 

-시집 『감(感)에 대한 사담들』, 문학동네, 2013년

 

 


 

 

윤성택 시인 / 막걸리 한 잔

 

비가 온다는 예보만으로도 인정머리 없는 아스팔트를

찰싹찰싹 때려주는 빗소리가 들리고,

나무들이 푸는 잎사귀 몸내가 맡아진다

주렴처럼 낮게 드리운 구름 아래에서는

왠지 삐딱하게 다리를 꼬아도 되겠다 싶어,

하느님 오늘은 막걸리 한 잔 쨍하실 거죠,

세상 움푹한 곳은 모두 채워질 잔이잖아요 피식,

지평이었다가 서울이었다가 포천인 그 탁한 하늘

희멀건 속내를 휘휘 저어 벌컥 이해해버린다

무슨 말을 해도 빗줄기는 바닥에 이어폰 꽂고

생각을 알아내는 게지, 그렇지 않고는

기분이 비를 흠뻑 맞고와 실실거릴까

취한다는 건 누가 나를 잠시 나의 밖으로 불러내

몸은 쑥맥이야, 귀엣말 해주는 것

그 내통을 알면서도 몸은 매번 나를 위로하곤 한다

그런 내가 안타까워 코를 골아주다가,

마지막까지 나를 가득 채워 놓고

또 한 잔이 된다 내일은 주일이고

모레는 주일에 취해 춘곤한 날

태초에 비부터 뿌려놓고 흙을 주무르신 아귀힘이

여태 나를 둥글려 주시는 걸 느낀다

빗줄기가 띄워 놓은 왕관 무늬 위 딱 한 점 물방울처럼

시간이 정지된 그 활공을,

툭 젓가락으로 집는다

그러니까 저 밖이 수많은 空에 관한 매혹이라고

기분부터 마중 나가 보는 밤

 

- 『딩아돌하』 2018년 여름호

 

 


 

윤성택 시인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에 「수배전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 시집으로 『리트머스』(문학동네,2006), 『감(感)에 관한 사담들』(2013)가 있음. 한국 시인협회 2014년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 2019년 제9회 <시와 표현> 작품상 수상. 현재 문화예술마을 헤이리 사무국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