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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두호 시인 / 안개 속의 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3.

신두호 시인 / 안개 속의 뇌

 

 

비를 준비하는 구름들의 이동

암실처럼 붉은 밤을

흘러 다니며 부유하는 속삭임들

기원을 찾아 떠도는 말들 사이에

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할 때

피부를 타고 흐르는 어둠과 정적

 

세계가 온갖 생명체들로 채워져 있을지 몰라

그것들을 구분하려 생긴 신호와 표시들

이제는 무력해진 법률 속에

점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일

손을 내미는 것이

두 눈을 감는 것과 같아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는

너라는 목소리의 형상

 

길은 하나의 색상으로 통일되어 있다

우리가 서로에 기울어지기 전부터

직선적인 태도로 완성되어

합의되기 이전의 세계를 구석들로

말로 흉내 낼 수 없이 구체적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는 길

 

불빛 속에 휘말려드는 잎들

가능한 한 밝아지려는 어둠에 흔들리는 가지들

신전의 일부분처럼 기둥들은 세워지고

꺼지지 않는 어떤 불꽃도

그 끝에서 자신의 사라짐을 반복하고

우리가 서로의 말을 알아차릴 때까지

계속해서 점멸하는 검고 붉은 밤

 

흐릿하게 번지는 풍경들의 시야

헤쳐 나가야 할 것으로 주어진 길 위의 자연

움직이는 것들에 부여된 생명 속에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꿈꾸는 심장

그곳에서 너는 두 눈을 뜨고

주어진 두 손을 번갈아 뒤집어 보고

네가 숨 쉬며 도망쳐온 처음의 잠으로부터

너라는 존재의 실물을 맞이한다

 

침묵 속에서 굳어져가는 구름들의 형상

이제 막 생겨난 바람을 붙잡아두는 일

말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흐르는 물

우리의 형체가 우리의 행위 속에서만 보존된다면

사소한 움직임만이 세계를 감싸 안는다면

명령처럼 내려오는 것은 하나의 목소리

불빛 속으로 깊어지며 시작되는 걸음

 

 


 

 

신두호 시인 / 자연에의 입문.3

 

 

거리는 시민으로 성장할 기회를 모두에게 배분합니다

비물질적인 차원으로 흩어져 있는 인류와

동식물들은 전례 없이 생략되고 있습니다

불빛마저도 안개 속에서 창궐합니다

거리에 속도만이 전시되어 있을 때

우리는 누군가로 기억될지 알지 못합니다

어깨를 부딪치고는 영원히 멀어집니다

안개는 도로 위에 자동차를 발생시키고

불빛은 속도의 방향을 추적하지만

빛이 사라지는 곳에서

창문의 운동도 끝이 납니다

기침으로 우리의 현존을 들키면

도로의 끝에서 끝으로 출몰하는 언덕들

경사가 사라진 곳에서 모두 숨을 고릅니다

바닥에 쓰인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람객은 거리의 외부에 군림하는지

나무만이 해발고도에 따라 흔들리는 세계

이곳에선 언약이 악수를 대신합니다

시민의 누구도 사회와 접촉하지 않으며

극소량의 숨을 서로에게서 전달받습니다

최소한의 양분으로 성장하기 위해

모두들 각자의 속력으로 엇갈립니다

거리의 내부로 스며들 수 있도록

불이 꺼진 창을 차례로 추월합니다

유리 조각이 더 이상 유리가 아닐 때까지

상대적으로 희박해지기만 합니다

 

-《문학선》가을호)

 

 


 

신두호 시인

1984년 광주 출생. 조선대학교 대학원.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2017)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