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 시인(상주) / 백련
얼핏 들떠 보이나요 하긴 무릎에 늘 물살을 얹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이리저리 밀리지 않고는 여린 몸을 버티는 정신의 등(燈) 하나 달아맬 수 있나요 달처럼 맘껏 구름을 차내며 환해지고 싶죠 그나마 한 해 사흘은 휜다면서요 저절로 불이 들어와 무명(無明)의 몸 밖으로 빠져 나올 그때거든요
한 번만이라도 회산 방죽으로나오세요 대명천지를 더 밝히는 불빛이 물에서 뭍으로 오르죠 칠월에서 구월까지 길은 이어지는데 길 다 두고 남 따라 포개어 걷는 연잎의 짙푸른 어둠 몇 길 물밑 허공을 밟고 선 꽃의 찬 이마 그 어디쯤 덜컥 오욕 칠정의 붉은 고뇌도 갇혀 있어요
무심한 듯 바람이 밀고 가죠 흰 빛을 멀리 갈수록 맑디맑게 개이는……
김현숙 시인(상주) / 새
어린 풀들 사이를 거닐다 나뭇가지에 푸른 생각을 걸어놓는다 물 위를 총총총 걸어다니는 친구도 있다 나무처럼 땅에 매이지 않고 돌멩이처럼 물에서 가라앉지도 않는다 말하고 싶을 때 노래한다 갖은 빛깔과 모양새로 덧칠하지 않으며 짧게 때로는 더 짧게 너무 배불리 먹지 않고 또 세상을 움켜쥐듯 눈부릅뜨고 훑어보지도 않는다 이러니 세상이 의심없이 천지간을 다 내어주나 보다 신이 부를 때는 두려움 없이 하늘로 튕겨 오르지만 원하는 건 다만 마음의 길을 가는 것 몸에 짐을 쌓지 않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때로는 더 가벼이 흩날리는 홀씨
김현숙 시인(상주) / 몽돌
물은 천리를 흘렀는데 그대 한 자리에 앉아 천 날의 물결을 깎았는가 가파른 주의주장도 누그러지고 날선 입도 잠잠해 졌구나
가끔 자갈거리며 해소기침 끓는 소리 수 만 바람과 부대끼었나 엎어지고 깨진 파도의 집채 가라앉아서
-시집 《물이 켜는 시간의 빛》(2007. 9. 지구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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