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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숙 시인(상주) / 백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8.

김현숙 시인(상주) / 백련

 

 

얼핏 들떠 보이나요

하긴 무릎에 늘 물살을 얹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이리저리 밀리지 않고는

여린 몸을 버티는 정신의 등(燈) 하나 달아맬 수 있나요

달처럼 맘껏 구름을 차내며 환해지고 싶죠

그나마 한 해 사흘은 휜다면서요

저절로 불이 들어와

무명(無明)의 몸 밖으로 빠져 나올 그때거든요

 

한 번만이라도 회산 방죽으로나오세요

대명천지를 더 밝히는 불빛이 물에서 뭍으로 오르죠

칠월에서 구월까지 길은 이어지는데

길 다 두고 남 따라 포개어 걷는 연잎의 짙푸른 어둠

몇 길 물밑 허공을 밟고 선 꽃의 찬 이마

그 어디쯤 덜컥 오욕 칠정의 붉은 고뇌도 갇혀 있어요

 

무심한 듯 바람이 밀고 가죠

흰 빛을

멀리 갈수록 맑디맑게 개이는……

 

 


 

 

김현숙 시인(상주) / 새

 

 

어린 풀들 사이를 거닐다

나뭇가지에 푸른 생각을 걸어놓는다

물 위를 총총총 걸어다니는 친구도 있다

나무처럼 땅에 매이지 않고

돌멩이처럼 물에서 가라앉지도 않는다

말하고 싶을 때 노래한다

갖은 빛깔과 모양새로 덧칠하지 않으며

짧게 때로는 더 짧게

너무 배불리 먹지 않고

또 세상을 움켜쥐듯

눈부릅뜨고 훑어보지도 않는다

이러니 세상이 의심없이

천지간을 다 내어주나 보다

신이 부를 때는

두려움 없이 하늘로 튕겨 오르지만

원하는 건 다만

마음의 길을 가는 것

몸에 짐을 쌓지 않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때로는 더 가벼이 흩날리는 홀씨

 

 


 

 

김현숙 시인(상주) / 몽돌

 

 

물은 천리를 흘렀는데

그대 한 자리에 앉아

천 날의 물결을 깎았는가

가파른 주의주장도 누그러지고

날선 입도 잠잠해 졌구나

 

가끔 자갈거리며

해소기침 끓는 소리

수 만 바람과 부대끼었나

엎어지고 깨진

파도의 집채 가라앉아서

 

-시집 《물이 켜는 시간의 빛》(2007. 9. 지구문학사)

 

 


 

김현숙 시인(상주)

1947년 경북 상주시 출생. (金賢淑).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졸업. 1982년 <월간문학> 등단. 1989 윤동주 문학상 수상, 2019 이화문학상 수상, 중등 교사, 연화주민복지관 도서관 관장 외. 저서; 『유리구슬 꿰는 바람』, 『마른 꽃을 위하여』, 『쓸쓸한 날의 일』, 『꽃보라의 기별』, 『그대 이름으로 흔들릴 때』, 『내 땅의 한 마을을 네게 준다』, 『물이 켜는 시간의 빛』, 『소리 날아 오르다』, 『아들의 바다』 외 다수. 서울시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