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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8.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아이스크림, 돌고래, 기도

내가 좋아하는 거야

지옥은 쓸쓸하다는데,

연한 잎처럼 새살이 돋을 때

이마에 얹힌 무능한 손과

영영 죽지 않을 속살이 있다면

순교자처럼, 오로지 네 힘으로만

걸어갈 수 있을까

여름이 끝나는 동안

원치 않는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늘에게

나는 고백하기로 했어

서로가 서로를 몰라서 죄짓지 말자고,

단순한 섹스 스캔들이라고,

이번 생은 역시 NG에 지나지 않다는 걸

이것이 의아한 세계인 것이다

네가 있는 배경에 날 그려 놓고

꼴불견 광대처럼 얼굴에 색칠하고 웃었지

곱고 예쁘다는 얘기는 질리더라

맹세하는 게 좋아,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어쩌라고, 난 나쁜 계집앤데

굿 걸, 이라는 소리는 좀 그만해

울지 않을 참이니까

기억이 눈을 멀게 하듯이

죽음과 상관없이

너무 우울해서 택시도 타고 동화책도 샀어

글이 사라지고, 재앙이 사라지며,

불공평했던 아름다움도 사라지는 걸까

쥐똥보다 못하던 내 삶이

조금 살만한 게 될까.

아니, 근데 아저씨 누구세요?

제 생업은 노동자고

본업은 미친년, 그게 나예요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뿌리를 내려

늙어서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시간 나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도 좀 봐

생명이 어떤 건지,

그동안 얼마나 비천한 마음으로

싸워왔는지

그래, 너는 얼마나 겸손해졌니

사념으로 기록된 일기장은 어때

물고기처럼

숨을 참지 않아도 돼

그저 침묵할 뿐,

내내 상상되지 않는 비극이라서,

말을 하지 않을 뿐,

나는 좀처럼 정직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구원이 필요해

이를테면,

죽어서는 몸을 벗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 같은 것

​​​

<포지션 20년 겨울호>

 

 


 

 

김하늘 시인 / 레몬증후군

 

 

 세면기에 오줌을 누다가 거울 속 피에타를 봤니

 지퍼를 잠그는 법을 잊어버린 소년이거나

 팬티 속에 날달걀을 넣고 다니던 성소수자 청년이거나

 둔탁한 상자를 열기 전 초조한 프시케 볼에 오른 홍등을 알아

 17번째의 담배를 지져 끄고 창문 난간에 선 남자였을까

 장래희망이 오후 4시의 햇빛이라고 말하던 여자의 외계인 병이었을까

 하루에 한 알씩 레몬을 수면제처럼 먹던 그들, 혹은 우리들

 

 젊었다, 태생적으로 우울했고 바랜 셔츠 단추 한 개쯤 떨어지는 동안의 연애도 했지 헤집으면 열리는 길을 믿었어 레몬 슬라이스를 서로의 입에서 입으로 여름벌레가 울 때부터 눈보라를 기다렸어 매일매일 작아지는 미끄럼틀 위에서 내 그림자는 네 발등에 키스했어 폭풍의 자세로 무너져가는 너 좋은 예감을 할 수 없는 나 그 시절의 일기는 아직도 소용돌이 속에

 

 귀 밑의 둥근 멍울에 대해서 말해 줄까

 여자는 레몬이었어

 잠깐 깔깔거리기에 모자란 밤 우리는 레몬다웠지

 자주 내 얼굴을 잊어버릴 만큼 안개가 뜨겁고 폭설의 기미가 보이면

 너는 명랑하게 울 수 있을까

 

 찬란한 노랑, 단단한 껍질을 무기처럼 빼앗긴 생을 질투해, 망자의 혀는 도망치는 생명력을 시기해, 낙태를 하고 뻔뻔하게 마취약에서 깨어나는 증후군처럼, 굿바이 겨울, 예정된 이별은 익히기 쉬운 습관, 힘을 잃은 계절에 여름의 옷차림을 하고 떠난 레몬에겐 할당된 내일이 없어

 

 나는 아무 때나 끔찍해 하며 117번째 담배를 지져 끄는 중

 

 가장 레몬의 색을 닮은 오후 4시의 햇빛이 싫어 어떤 비난에도 바지를 적시는 질펀한 레몬즙을 레몬, 레몬, 레몬…… 뿜겠지 너를 발음하는 혀의 곡선이 좋아 네게로 가는 길은 온통 노란 신호등 레몬 깜빡 레몬 깜빡 지상에 도착한 최초의 빛처럼

 

 나는 아무 때나 끔찍해 하며 117번째 담배를 지져 끄는 중

 

 


 

김하늘 시인

1985년 대구에서 출생. 2012년 하반기《시와 반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샴토마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