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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현승 시인 / 촉촉한 생활 박물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9.

류현승 시인 / 촉촉한 생활 박물관

 

 

케플러 망원경으로 지구를 들여다 보면

ㄷ자로 쪼그려 앉아 노래하는 대류가

뒷마당에 나다니는 바람이 된 이유가 보이고

정열이 밀려 나가고 냉랭한 기운이 차올라

자리가 비어 선으로 채운 음영

텃밭 아이는 깻잎, 애호박, 토마토, 오이를 따고 있다

먹구름을 털고 있다

삶은 채소 같은 사람은

손바닥 틈틈 손가락 사이로 남는 여유

면을 휘어

비오는 날 버덩에 물을 채운다

 

만성피로 비타민을 먹자 메가도스100mg

더, 더, 더, 조금만 더

우울해 c, c, c 비타민 c를 먹자

물을 꽉 채운 TV 속에는

물 속으로 나는 가마우지

목을 졸라 목에 끈을 묶어 삼키지 못한

생선을 뺏는 노인을 보다

방아깨비처럼 쇼파 흔들, 흔들리다 스파, 아스파, 쇼파

 

영통구 청명남로 족발집 딸은 시 공부를 한다네

두툼한 시인은 그윽한 목소리로 죠-옥-발을 낭송하여

여주인에게 느글덕한 콜라겐을 돌려주네

건너 김밥집 유리창 안에 검은 덮개에 돌돌 말리는 것 같은

 

 


 

 

류현승 시인 / 문득, 이 따뜻한

 

 

유칼립투스는 가지도 넓어

나무그림자 안에 숨은 그림자 날숨은 길어

 

혀에 밀린 단발 명령어에 투명비닐 옷 입은 원숭이가

네가 원하면, 내가 원하면

떼 알로 뭉친 어둠을 물고 할퀴다

바람 부는 곳으로 줄을 탄다

 

아침신문에 아포리즘을 갈아 낸 부조리 몇 홉쯤이야

이타의 섬 그늘아래 탄 누룽지 같은 암세포쯤이야

눈 앙금 길을 지나 온 여름 슬러시 같은 거라고 한 개비

 

그녀의 봄은 백목련 꽃등이 개흙바닥을 탁본하는 거라

뜬금없는 종결을 하고

저, 절대가 긁어 준 개운한 손치레라고 한 개비

 

휴직休職의 바깥

유리벽을 뚫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아찔한 굴성이

골조만 있는 계단을 오르다

나이 탓에 '나는 아니라고, 안 된다.'고 하는 말에

머리 풀고 발달하는 우울

 

발을 뗄 때 누가 와서, 디딜 때 떠밀었다고

포효하는 페르소나와 넌출진 이기의 화해 시간

서로에게 건네는 한 개비

 

유칼립투스는 키도 넓어

잎사귀 끝으로 흐르는 문득, 이 따뜻한

독거獨居의 香 한 개비

 

 


 

 

류현승 시인 / 그의 식사는 완고하다

 

 

곳에 피었습니다

노랑 빨강 볕을 얹은 듯, 걸친 듯 맨드라미 피었습니다

동쪽에서 헤실헤실 살을 까맣게 태웁니다

우산살 같은 가지에 허물처럼 걸린 한 장이 펄럭입니다

수식어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자음, 모음을 딱풀로 붙입니다

너무 기뻐서 말이지요

눈 딱 감고 이해 하세요

어느 집 벽지에 스며 결을 만들었답니다

거뭇하게 말이지요

주름투성이는

졸다 바다로 나갑니다

포말이 포박이 되어 그의 입을 막습니다

따져보면 공기는 공기입니다

 

물밥에 김치 한 조각 얹어 한 술 뜨고

종일 TV를 마시는 거죠

신문을 들이켜다 기도가 막혀

─입자가 너무 컸어

귀로 삼켜지지 않는 소리

그 익숙한 난류를 마시는 겁니다

 

방문을 닫고

팔에 닿는 것 다르고 무릎에 닿는 것이 다르다고

바늘에 동앗줄을 꿰어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참 굵고 높은 오래된 나무 아래

주름투성이 늙은 개 사진 하나 그 곳에 있습니다

 

 


 

 

류현승 시인 / 서두르거나 에둘러 보거나

 

 

그녀의 양철지붕에 빗소리 위쪽에서 소리가 자라, 낮은 곳에서 서두른다

뛰어내리는 작은 것은 발뜀이 서투르다

 

처마 깊은 방에 닿지 않아 백토를 깔아 튕겨나오는 볕을 잡으려 했다

징검징검 건너 싸락싸락 오는 소리 들리면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과하지 않게 늘어지는 그림자 하나

 

저녁 오렌지색 기둥에 기대어 사방위를 가리키는

손끝에 걸린 달에서

얄미운 포식자가 튀어 나온다

달빛도 발자국소리도 컹컹 소리도 맨홀 구멍으로

동그랗게 빠져나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연골 냉소에 걸려 넘어진다

네 바퀴를 보도블럭 두뼘 턱 위로 밀어 올리다

긴숨 쉬게 해달라고 눈물 닦을 휴지 달라고

그러므로 걸었고, 그런데 끌고 가고, 그러니까 뒤밀이다

발등에 가랑잎 하나가 야유처럼 떨어진다

마추픽추 담벼락에 넣어 놓은 무청처럼, 시래기처럼 우거지처럼

 

감기 걸린 후 경계를 말하자, 순장을 말하고

못난이의 도치가 낳은 알이라고

무너트리겠다고 무너지라고 하늘에 구걸하는

혀를 차며 함께 가겠다는

 

 


 

류현승 시인

1964년 서울 출생. 2006년 계간《시안》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토우와 낡은 시계』(혜화당, 2009)가 있음. 인천문화 재단(다년간 -지정) 문학창작기금 수혜, 도공, 현재 도예공방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