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진 시인 / 무생물 도감
당신은 네모난 공중에 나를 그려놓았는데 나는 벽지에 그려진 구름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뭉개지는 얼굴에 스며드는 무표정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는 가끔 곤혹이 있고 언젠가의 기분을 되살리려 애쓰면서 우리는 점점 과거로 변해간다
당신은 입술을 굳게 다문 나를 그려놓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무생물의 고요
언제부터였을까 잠 속에서 꿈을 꾸고 꿈속에서 자는 것 지금 꾸는 꿈이 꿈인지 잠인지 알 수 없는 것
꿈에서 본 것이 당신이었는지 당신이 그린 나였는지 왜 구름 벽지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오랫동안 원형감옥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림에 포도나무 가지의 일부를 횡단면으로 절단한 다음 중간 아래쪽을 반으로 쪼갠 것* 이라는 제목이 아주 조그맣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날 꿈속에서 열 손가락이 가시덤불처럼 자라난다
* 니어마이아 그루의 「식물 해부」(1682)에 실린 그림.
강은진 시인 / 통증에 대한 낭만적 이해
통증을 견딜 때 입술은 있는 힘을 다해 빛난다 얼어붙은 폐광의 반짝임이 그렇듯
그때 가장 아름답고 싶어 거울을 들고 예정된 통증을 기다리는 동안 눈을 감고 오직 호흡에만 몰입하며 이 고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 보다가 문득 아빠가 생각났다
아픈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아빠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곤 했지만 난 이를 악무는 사람이었으니까 음지 덩굴처럼 가늘고 질기게 자랐다
슬픔이란 급성담도산통이나 근막동통증후군처럼 감정 없는 정직한 이름으로 와서 장마철 비닐 장판처럼 맨몸에 쩍쩍 달라붙는 것
어떤 의사들은 통증에 몰핀보다 판타지가 더 낫다고 믿는다 혈관을 타고 떠도는 하얀 고래의 웃음이 내 심장으로부터 몸의 가장 먼 끝까지
내게 없는 내장의 구조를 상상하는 일과 죽은 자의 말버릇을 흉내 내는 일 사이에 어떤 결기가 놓인다
견디는 것이 아니다 통과하는 것이다
강은진 시인 /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어떤 손놀림에도 일어서지 않을 평온한 유방을 가졌기 때문에 바람에게 여러 갈래 길을 터주는 성근 머리칼을 가졌기 때문에 빈 등을 쓸어줄 때 바스락 소리를 내는 비닐 같은 손가죽을 가졌기 때문에 늙은 여자가 좋다
구름을 닮아 가는 실루엣을 기교 없는 음성을 눈가의 주름을 좋아한다
치욕을 먼저 잊는 망각의 기술로 여자를 잊고 달처럼 흐르고 흙처럼 젖으며 몸으로 치르는 계절 시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그 파동 속에 있어서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태어날 때 그랬듯 잇몸으로 울고 웃고 물 말아 밥을 먹다가 문득 제사상에 바나나와 커피를 올려 달라 유언하는 소리 가까운 험담은 못 듣고 먼 산 꽃 지는 건 가장 먼저 알아챌 때 어느 새벽 고요히 머리 빗는 소리
그래서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좋아서 억새처럼 누웠다가 여자처럼 늙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늙은 여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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