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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근화 시인 / 소울 메이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9.

이근화 시인 / 소울 메이트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비의 기억으로 골목이 넘치고

비의 나쁜 기억으로

발이 퉁퉁 붙는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 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이근화 시인 / 도서관에 갔어요

 

 

도서관에 갔어요

걸어서 갔어요

 

첫째 날은 이별을 고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꿈의 허연 입술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둘째 날의 도서관은 조금 추웠습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낡은 스웨터를 다시 꺼내들었어요

 

멀쩡한 여자가 책과 책 사이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집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셋째 날의 도서관은 텅 비었어요

바작바작 종이를 씹어 먹었는데

 

물고기 같은 것이 튀어 올라

작고 빛나는 글자들을 토해냈습니다

 

어지럽고 기분이 막 좋아집니다

도서관에 갔어요

발을 질질 끌고서

 

사탕을 천천히 오래 녹여 먹으면

죽을 때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정한 팔이 나의 목을 조여옵니다

입 없는 사람들이 무섭게 서 있었어요

 

도서관에 갔어요

죽음이 덜컹거리는

 

 


 

 

이근화 시인 / 금 팔러 간 이야기

 

 

내게도 금은 있다

동전보다 빛나고 지폐보다 무거운 금이 있다

서랍에 처박혀 무거운 목소리를 내는 금이 있다

금값이 치솟고 고가매입 전단지와 안내판이 걸리니 공연히 그걸 꺼내 보았다

집안 경제도 못 챙기는 나는

유럽 경제나 미국 증시 같은 건 알 수 없다

동네 금방 아저씨 얼굴도 가물가물

가물치처럼 길쭉하고 기름졌던가

쌀을 안치기도 귀찮은 날

동네 칼국수 집에 들렀다가 가물치와 마주쳤다

이십이만 오천 원

한때는 이십오만 원까지 쳐줬단다

미끈한 정보 사이로 그의 눈빛이 빛났던가

나의 눈빛이 가물치처럼 찢어졌던가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설렁설렁 살고 싶은데

여행을 갈까 적금을 들까 코트를 살까

비스듬히 내리는 비가 오늘 내 서랍을 적신다

칼국수 속 드문드문 박힌 조개도

아까 잠깐 웃었던 것 같다

 

 


 

 

이근화 시인 / 짐승이 되어가는 심정

 

 

아침의 공기와 저녁의 공기는 달라

나의 코가 노을처럼 섬세해진다

하루는 세 개의 하루로

일 년은 스물아홉 개의 계절이 있다

 

나의 입술에 너의 이름을 슬며시 올려본다

나의 털이 쭈뼛 서지만

그런 건 기분이라고 하지 않아

나의 귀는 이제 식사에도 소용될 수 있을 것 같다

 

호수 바닥을 긁는 소리

중요한 깃털이 하나 빠지는 소리

뱀의 독니에서 독이 흐르는 고요한 소리

 

너는 죽었는가

노래로 살아나는가

그런데 다시 죽는가

 

수많은 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지만

강을 건너는 나의 어깨는 너의 것이고

이 어둠을

너의 눈 코 입을 기억하는 일은

 

나의 것인데

문밖에서 쿵쿵쿵 나를 방문하는 냄새

침이 솟구친다

식탁 위에 너의 피가 넘친다

 

 


 

이근화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 단국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현대문학》에 〈칸트의 동물원〉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이 있음. 2009년 제4회 윤동주문학상. 2010년 김준성문학상(21세기문학상,이수문학상.), 제11회 오장환문학상. 2012년 제58회 현대문학상 시 부문 수상. 현재 〈천몽〉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