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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옥 시인 / 도망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9.

이진옥 시인 / 도망자

 

 

칼을 가는 동안, 케이크가 배달되었고

잘린 너의 살 지독한 맛이네, 벼린 칼이 달콤함을 갉아먹고 쓴맛만 남아

케이크라 이름 붙이기 민망하나 달리 부를 수도 없는 모순의 몸뚱이

벼린 칼은 그녀의 뱃속에서 달콤하게 꿈틀거리고

 

버스를 타고 가다 오른쪽 앞 유리의 균열을 보았다

질주하는 상처, 도시를 베고 다니는 충만한 증오

마주 볼 수 없어 비스듬히 곁눈질하다

한 근, 두 근, 서걱, 서걱, 심장이 베어지는 소리 들었다

살아 있으려면 호기심은 금물이다

이름을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얼마나 아프냐 묻지 않아야 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순례의 길은 진지하게 매번 다른 장소에서 출발, 죽은 쥐를 물고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순례의 길은 진지하게 매번 같은 장소에 도달,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물고 불안했던 쥐

브레이크가 고장 난 버스는 도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진옥 시인 / 블루

 

 

시간이 토해 놓은 질퍽한 토사물에 몸을 굴리다, 시간은 생각보다 끔찍한 냄새를 갖고 있다 거울 안의 나와 눈이 마주친다

 

뼈와 살은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건지, 거울 안의 내가 거울 밖 나를 안다고 한다

 

어떤 것에든지 뾰족한 굽을 박아 넣는 건 못할 짓인 것 같아, 하이힐을 신지 못한다 거울 밖이 말한다

 

끓는 물을 벤저민 다리에 들이붓는 건 어떨 것 같아, 오그라드는 벤저민 다리를 보려고 물을 끓인다 거울 안이 말한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갔는데, 누구를 본 기억이 없다 거울 밖이 말한다

 

나를 찢어 너를 놓아주고 싶어, 거울 안이 속삭이며 가슴을 연다

 

조각난 거울 위에 떨어진 뼈와 살의 불화, 몰락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이제는 너를 모른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안전한 여정을 위해 입술을 닫겠습니다

입속에 돋은 가시를 질식시키고 이만 끝내겠습니다

 

 


 

 

이진옥 시인 / 口旨歌

 

 

입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지금 당장 입을 내밀어야 해요

하나밖에 없는 걸 줄 인간이 어디 그리 흔한가요

하지만 필요하다면 가지고 가세요

난 인간이 아니죠

 

기억하죠

넌 여자도 아냐, 뒤집힌 양말이 식탁 밑을 뒹굴 때마다 엄마가 하던 말

넌 인간도 아냐, 헤어지자는 내게 게거품 물던 옛 애인이 하던 말

넌 미친개야, 술에 취해 닥치는 대로 물어뜯을 때 친구들이 하던 말

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면 참 지루하겠죠

 

노래를 불러 줄까요

거북아, 거북아, 헌 입 줄게 새 입 다오

새 입을 받게 되면 자축의 의미로 한번 부딪히는 건 어떨까요

타액을 먹고 자란 붉은 꽃받침-푸른 꽃잎은 타액을 먹지 않죠-

그 끝에 기형의 씨앗이 위태롭게 달려 있을지라도

노래는 계속되죠 거북아, 거북아, 혀를 내놓아라

 

나는 달렸어요. 달린 게 아니라 달렸어요. 대롱대롱,

날 달리게 한 그 많던 입이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그리워요, 입. 입. 입.

 

 


 

 

이진옥 시인 / 시지프의 돌

 

 

어머니 오늘 밤은 달이 너무 동그래요

달을 굴려주세요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게 환하게 굴려 주세요

 

어머니 나는 달을 훔치지 않았어요

잠시 바라보았을 뿐인데

내게 주어진 가혹한 형벌

어머니 나는 눈동자를 굴려야 해요

꿈 밖으로 떨어질까

꿈속에서도 굴려야 해요

눈동자는 떨어져 산산 조각났으면 하고

원할지도 모르는데

멈출 수가 없어요

 

굴러 떨어진 것을 향해 다시 돌아

서둘러 굴리는 수천수만의 시도,

캄캄한 길모퉁이 구르다가 찍힌 발등,

비명이 손목을 비틀어 더는 굴릴 수 없을 때조차

멈출 수가 없었는지, 멈춰지지 않았는지

 

어머니 그땐 몰랐어요 신들의 장난이란 걸

끝자락에 와서야 눈치채게 되다니요

깊게 드러누운 눈동자를 잠깐씩 일으켜 굴려보는 일

생의 종착역 부근에서 신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조크라 생각해 주세요

 

어머니 오늘 밤은 달이 너무 동그래요

달을 굴려 주세요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게 환하게 굴려 주세요

 

-예술가 제2호 신인상 수상작

 

 


 

이진옥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2010년 《예술가》를 통해 등단. 예술가작가회 회장. 군포예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