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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락 시인 / 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9.

김락 시인 / 멸

 

 

공중제비를 넘는 소년이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를 짚고

공중으로 사라진 시간

 

나는 너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해

나무의 곡선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비명을 들어봐

어린 아카시아에서는 숨 막히는 열기

 

숲의 기침을 들을 것,

흙의 눈동자들이 떠오르네

 

악기의 마지막 진동은 날아

불타는 구름으로

머리 위 떠다니는 안개의 갈라진 등으로

성당의 녹색 지붕에 매달린 울음으로

 

땅 속에 누운 너는 누구의 하얀 발톱을 쓰다듬는가

너의 이름을 훔쳐간 야생고양이

저항의 흰 팔을 자른 보병

개구리의 노란 눈을 가진 견고한 영혼들

 

공중에서 검은 우산들이 눈물처럼 내려와서

나는 너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해

 

적어도 너에게는 잊히지 않기를

지금 폭발하는 이 숲이

 

 


 

 

김락 시인 / 홍대 앞에서 로리타의 시간을 사세요

 

 

시급을 받은 히치하이커는 어디를

 

길거리 악사의 연두빛 향이 풍기는 환락과

불안이 따뜻하게 익어가는 냄새

팔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의 헛손질은

어디에서

 

초록 벤치 밑

작은 고양이가 마주한 죽음의 눈알은

어디로부터

 

천 개의 모래시계를 삼킨 로리타,

로리타와 함께

 

*

 

우리는 안으로, 안으로, 밖으로

어딘가로 들어가려해

 

구름의 흰자위가 축축하게 흘러내릴 때

기분이 물고기 눈물만큼 시리기도 해서

 

쏠쏠한 단어들이

밀도 있게 들어찬 분홍 간판의 카페와

유언집행인이 하얀 기침을 쿨럭이는 식탁

둘레로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아멘,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얼룩말과 기린이 날 죽이게 하소서

 

*

 

갈기 찢어진 골목들을 지나

로리타는 자전거를 타네

 

우리는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더듬으며

나는 지극히 정상!

이라는 상대적 안위를 느끼지

서로의 눈 깊이 잠긴 묘비를 읽어주지

 

0과 1 사이를 지나

로리타는 자전거를 타네

 

무릎까지 올라온 타이즈를 신고

시들어버린 모자를 쓴 야윈 신사,

그는 호황업계대표

주머니에서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지폐가 나온 적이 없지

 

면도날처럼 얇은 그의 눈과 마주칠 때

로리타, 로리타여 너의 시간은

살색 빵의 질감으로 더욱 부푼다

 

르르르르르르

로리타는 타네 자전거를

 

*

 

두꺼운 털옷 속에 잠든 꿈을 이용하세요

질문을 이용하세요

코끼리 코만큼 절박한 심정을 가집니다

라고 허공의 펄럭이는 소맷자락에 적힌

슬로건을 향해

 

점프,

 

그리고 점프,

 

그리고 종아리가 끊어지네

 

황량한 기후의 뒤뜰을

밤새

흥겹게 배회하는 외다리들

 

*

 

찢어진 운동화 속에 혼란 40%, 이상한 비밀들 40%, 후회 19%

그러니까 하루를 계속 걸어가기

 

*

 

느릿느릿 생에 침범하는 그늘은 왜 그토록 우리를 품으려는 걸까

 

곧 부서질 목을 감싼 붉은 목도리에서 왜 겨울의 하얀 죽음이 먼저 피어나나

 

컵에 길게 떨어지는 우유처럼 의문이 조용히 이어질 때

 

휘몰아치는 슬픔이 잠든 저녁을 침고인 채 씹을 때

 

춤에 대한 미친 사랑

 

이방인들의 도피처

 

로리타 로리타여,

 

설익은 사과 위로

비가 내린다

 

 


 

 

김락 시인 / 마왕

 

 

친구 너는 그곳에 있지

젖빛

여름 바람

돌비라는 고양이의 모성이 흐르는 물가

너의 목소리를 더듬으며 보랏빛 달 아래 철기군들이 모이네

 

너는 목소리를 빼앗아가도 좋아!

귀를 모을 테니

 

맹인 아이들의 눈 속에 지은 고해소와

발목에 엄습하는 습한 냉기를

실증하기 위해

 

고스트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라, 너의 안식을 빼앗으라는 임무를 맡은 악당처럼 서러운 잎이 얼굴을 뒤덮네, 흔들리는 불새는 어둠을 자르며

 

철기군들은 오늘도 그곳에 있다

소년들의 귓가

밤을 움직이는 커다란 부채가 떨어뜨린

음악에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친구 너의 겨울이 목격된

작은 마을

 

도돌이표 안에서

 

철기군은 먼 길을 헐떡거렸네

끝없는 지뢰밭을 걸어가는 붉은 사원들은

 

*넥스트 "불멸에 관하여

 

 


 

김락 시인

1983년 부산에서 출생. 본명: 김향지. 201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과와 컴퓨터교육과, 동국대학원 영화영상학과 졸업. 대구불교문인협회 회원. 한국문협 경주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