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임 시인 / 이름 뒤에 숨은 것들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 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 피고 꽃 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2016년 EBS 국어수능교재 수록
최광임 시인 /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바람 부는 날 가십시다 사랑도 불처럼 뜨거운 것이라야 가슴 데이듯 하얗게 이빨 드러내놓고 미친 소리로 외쳐대며 퍽퍽 까무러치는 모습 보아야 할 거 아니오 바다와 툭 터놓은 이야기 한 판 끝나거든 가슴 헤쳐 놓고 사랑 한 알 미움 한 알 소주잔에 타서 마십시다 생애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접시 위 낙지의 비애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고무다라 위 좌판 벌여놓은 석화같이 버짐 핀 아낙의 매운 삶을 엿보거나 그렇게 사랑도 미움도 갈팡진 우리의 내일도 소주 한 잔에 섞어 마시고 오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부디 바다가 요동치는 날 가십시다
최광임 시인 / 오래 전부터 그 길을 다니고
봄기운에 이끌려 그와 드라이브 간다 땅 속은 지금 실눈의 껌벅거림으로 분주한 미진이 일고 있으리라
옥천 영동 지나 그만 추풍령을 넘었다 예상에도 없던 김천까지, 되짚어 국도를 달린다 옥천쯤, 산 아래 길 하나 하얗다 지나칠 때마다 생소하게 다가온다 저 곳도 가보고 싶어요 야트막한 산을 헤집고 나 있는 길 숲 그림자에 둘러싸여 반쯤 끊긴 길 이 사람아 우리가 노상 다녔지 않은가 내 어눌함에도 친근감을 더하는 익숙한 그 문득문득 그의 마음 가늠하지 못해 궁금해지던 사랑 그래, 오래 전부터 수 없이 다니던 길 날망 하나 넘으면 오래 된 마을이 나오고 비탈에 검은 삼밭이 있는 곳 저렇게 낯설 듯 지금 어둠 속 촉수 하나 세운 씨앗들 나와 같으리라 그와 내가 다닌 길인 줄도 모르고, 오래 전 그의 마음 다 본 줄도 풀잎의 풀잎들이 오래 전부터 그렇 게 움 틔운 줄도 모르는
아흐, 발바닥을 간질이는 씨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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