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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광임 시인 / 이름 뒤에 숨은 것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9.

최광임 시인 / 이름 뒤에 숨은 것들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 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 피고 꽃 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2016년 EBS 국어수능교재 수록

 

 


 

 

최광임 시인 /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바람 부는 날 가십시다

사랑도 불처럼 뜨거운 것이라야

가슴 데이듯

하얗게 이빨 드러내놓고

미친 소리로 외쳐대며 퍽퍽

까무러치는 모습

보아야 할 거 아니오

바다와 툭 터놓은 이야기 한 판

끝나거든 가슴 헤쳐 놓고

사랑 한 알

미움 한 알

소주잔에 타서 마십시다

생애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접시 위 낙지의 비애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고무다라 위 좌판 벌여놓은

석화같이 버짐 핀 아낙의 매운 삶을

엿보거나 그렇게

사랑도 미움도

갈팡진 우리의 내일도

소주 한 잔에 섞어 마시고 오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부디

바다가 요동치는 날 가십시다

 

 


 

 

최광임 시인 / 오래 전부터 그 길을 다니고

 

 

봄기운에 이끌려 그와 드라이브 간다

땅 속은 지금 실눈의 껌벅거림으로

분주한 미진이 일고 있으리라

 

옥천 영동 지나 그만 추풍령을 넘었다

예상에도 없던 김천까지, 되짚어 국도를 달린다

옥천쯤, 산 아래 길 하나 하얗다

지나칠 때마다 생소하게 다가온다

저 곳도 가보고 싶어요

야트막한 산을 헤집고 나 있는 길

숲 그림자에 둘러싸여 반쯤 끊긴 길

이 사람아 우리가 노상 다녔지 않은가

내 어눌함에도 친근감을 더하는

익숙한 그 문득문득

그의 마음 가늠하지 못해 궁금해지던 사랑

그래, 오래 전부터 수 없이 다니던 길

날망 하나 넘으면 오래 된 마을이 나오고

비탈에 검은 삼밭이 있는 곳

저렇게 낯설 듯 지금

어둠 속 촉수 하나 세운 씨앗들 나와 같으리라

그와 내가 다닌 길인 줄도

모르고, 오래 전 그의 마음 다 본 줄도

풀잎의 풀잎들이 오래 전부터 그렇 게 움 틔운 줄도

모르는

 

아흐, 발바닥을 간질이는 씨앗들

 

 


 

최광임 시인

1967년 전북 부안 변산에서 출생. 대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도요새 요리』가 있음.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현재 반년간『디카시』 편집위원, 계간『시와 경계』부주간. TJB FM 《해피투게더》금요 게스트-<최광임 시인과 함께 하는 감성놀이? 공감놀이-길 위에서 만나다>. 계간<시와 경제> 부주간. 창신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