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루비 시인 / 두물머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9.

김루비 시인 / 두물머리

 

 

서 있는 느티나무를 깃발로 흔들며

강물은 흘러갑니다

하나의 강과 또 하나의 강이 머리를 맞대고

큰 강을 이루는 두물머리

쓰라린 강바람에 홀로이 버티다가 얼어버린 조각배

그 곁에서 따사로운 손길 부여잡고

그대 따라 물길처럼 흐르고 싶은

내게도 그런 한 때가 있었습니다

가끔 물풀 속에서 얼굴 내미는 잉어의 눈망울은

나를 빤히 보고는 무심히 지나갔고요

그대 눈동자가 느티나무 그림자를 반영하듯

눈물 한 방울 보탠 강은 꾸역꾸역

하구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갑니다

숨결 고르고 연어가 고향을 찾듯

거슬러 오르는 당신의 몸짓은

언제쯤 보게 될까요

걸어둔 깃발이 낡아 찢겨도 더 오래

당신을 기다리며 서성이겠습니다

 

 


 

 

김루비 시인 / 정박

 

 

안개비 자욱한 날의 바다는

젖은 여자의 머리카락이다

뱃머리 들이밀고 들어설 수 없는 머릿속에는

해초들 수없이 엉켜있다

달빛이 돛을 한숨처럼 펄럭이게 하는

망설임의 시간을 밀고 들어갈 항구에는

화끈거리던 방파제가 축 늘어져 있다

폭염을 막느라 생겨난 화상을

살랑거리는 바람의 콧노래가

달콤한 속박으로 달래주는

내 머리 속에는 언제 쯤

이별의 아픔 지워줄 안개비 내릴까

휘청거리는 해초들 사이로 들이민

손가락이 일으킨 거품들

햇살이 짚고 갈 건반처럼 떠있다

 

 


 

 

김루비 시인 / 자화상

 

 

별 뜬 밤

염소울음 소리 속을 걸어

집으로 가야지

나는 빗물에 씻긴 채 산모퉁이에 핀

보랏빛 얼굴 엉겅퀴니까

빈 집의 늘어진 감나무 가지가

담장과 지붕을 번갈아 간지를 때

마당의 허공에 흰 빨랫줄을 걸고

초경의 부끄러움 빨아 널어두고

빗물 담긴 항아리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빨리 마르라고 주문을 걸어야지

뒷산 대숲에서 퍼온 푸른 바람 소리로

피어라피어라 건네는 주문

온몸의 가시로는 모자라

불온한 손길의 접근을 막는

끈적이는 살갗을 가진

나는 엉겅퀴꽃

 

 


 

김루비 시인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졸업. 2016년 계간 《문장》 신인상 등단. 시집 『빨간사과는 열쇠 가게다』가 있음. 대구미술가협회, 대구시인협회회원. 형상시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