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규미 시인 / 분홍무릎
육십 몇 년 만에 아니 삼십 육억 년 만에 드디어 나는 한 적소에 당도 했네
한 때는 달의 모서리에 찍힌 손톱자국이었고 가시나무 가지를 맴도는 묽은 새소리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남루한 조각햇살이었고 깊디깊은 우울을 품은 바람의 멍든 발자국이기도 했지만
사각거리는 고요의 손바닥 위 나비처럼 가벼운 무릎과 무릎들의 시간 그 앞에 나는 말랑말랑 즐거운 나무 한 그루였다 시시비비의 무늬가 마알간 수틀속처럼 눈부시게 찰랑거리는 뜨거운 오후였다
어떤 시간의 마디에는 굴렁쇠처럼 구르는 은빛 시작이 있다고 했던가
손톱이 까만 이방의 소년도 기우뚱 분홍 무릎을 꿇는 늙은 낙타도 물과 바람과 빛의 풍화속에 묵묵히 발을 담그고 지금 막 한 계절을 지나는 중이어서
.................
내게도 분홍무릎이던 때가 있었다 활짝 핀 꽃처럼 한 생애를 열어 풀잎내음이 나는 여행자를 업고 타박타박 모래언덕을 넘던 날들이 내게도 정말 있었다.
부르튼 갈기를 어루만지며 수억 겹의 생애가 명멸하는 깊고 투명한 사막의 눈을 본다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쌓으며 다시 바다와 바다의 꿈을 꾸는 다정한 바다사자 한 마리가 내 앞에 있다
-시집 『각시푸른저녁나방』에서
권규미 시인 / 감자를 캐는 아침
줄남생이 같은 감자알들 안간힘을 쓴 듯 이마 위 주름살 팽팽하다 온 몸 까슬까슬 별이 박혔다
처음엔 물방울처럼 작고 맑았을 햇병아리 심장처럼 콩콩콩 뛰었을 손톱조각 뜬 야윈 어둠도 바다 같았을
모든 사랑은 슬픔이어서 울다가 깨어보면 훌쩍 키가 자랐다 각진 마음도 둥글어지고 그만큼 세상의 틈이 헐거워졌다
그만큼 나의 자리가 순해진 것 시간과의 사이가 조금 가까워진 것 어둠이 조금 물러나 준 것 별들이 스스로 제 키를 줄여 준 것
햇살의 젖꼭지에 매달려 우르르 몰려나온 감자알같이 어린 신들 앞에 저절로 몸이 낮아지는 아침이다
-시집 『각시푸른저녁나방』에서
권규미 시인 / 다정한 그림자놀이
죽음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어요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때때로 죽은 척 눈만 감을 뿐이죠 아침의 햇빛을 수의처럼 두르고 룰루랄라 무덤 속을 빠져나오죠 하늘과 땅 사이를 콩닥콩닥 굴러 넘는 붉은 꼬리 여우처럼 태양은 자신의 심장마저도 믿지 않아요 죽음은 먼 옛날 삼엽충이나 맘모스보다 먼저 우주를 다녀간 별의 종족이라고 누구나 믿었죠 문명은 늘 제 그림자에 가려 울기만 하는 갓난쟁이여서 무언가를 발명하기에는 슬픔이 턱없이 모자랐죠 와글와글 그릇 부딪는 소리와 젖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 먼지로 쌓이는 무덤 속 죽은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이에요 방부액에 담그지 않은 부장품처럼 문득 바스러지는 영혼을 처음엔 죽음이라 부를까 망설였어요 심장에서 스며 나와 발바닥에 매달린 서로서로의 죽음 위에 엔터 키를 치고 스페이스 바를 두드리면 무덤을 두른 희미한 그림자들이 심해어처럼 떠다녀요 죽음은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는데 달그락거리는 뼛조각을 끌며 달이 떠오르네요, 귀신처럼
-시집 『각시푸른저녁나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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