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미 시인 / 멜순*
길섶 가시덤불 속에서 용케도 멜순을 찾아내시는 어머니
재잘거리는 내 눈이 서운할까 마주치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에 간간이 추임새을 넣어주면서도 그녀의 등허리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향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지만, 내 눈에는 엉킨 실타래같은 가시덩굴 뿐
선밀 나물은 나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 있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얼른 달려와 다소곳이 앉는다 그 부름으로 환해지는 산보길 멜순도 허겁지겁 봄을 불러와 꽃을 피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선밀 나물과 어머니의 멜순 길바닥에서 엉켜 뒹구는 그 말들을 모아 어머니는 버무리신다 데쳐도 향기는 손끝에 남고,
어머니 몸엔 멜순향 나는 파스가 숨어 있다
멜순* : 선밀나물의 제주도 방언
강윤미 시인 / 벽에 세 들어 사는 몽골 여자
간혹 외풍이 들기 좋은 방엔 나와 여자가 산다 벽에 기대면 창문의 크기만큼 환해지는 그녀의 목소리 매일 저녁, 내 고막을 걸어 나온 그녀는 구멍가게에서 낡아가는 이국의 언어를 사들고 온다 언어를 경계로 단 한 번도 이름 마주친 적 없지만 그녀와 나는 누구보다 가깝다 문득 길을 가다 사막에서나 쓰는 말이 들리면 옆방에 사는 여자일까 뒤돌아보지만 그녀는 내가 한 번도 걷지 못한 고비사막이 되어 사라진다
볕 좋은 날이면 마당에 거죽을 널어놓는 그녀 문틈으로 빠져나온 영혼을 건조대에 두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도둑조차 들어설 수 없을 것 같은 한갓짐이 벽을 타고 흥얼흥얼 흘러나온다
라디오 목청을 돋우면 어김없이 벽지의 꽃잎 속에서 들려오는 이국의 향기 언젠가 아껴놓은 메아리를 듣는 것처럼 음악 속에 세든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 주변을 서성인다 서성거리다 내 귓바퀴는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간다 벽에 세 들어 사는 고비의 언어
기억 없는 기억을 들추는 사진처럼 그녀는 나를 설레게 한다. 잠 설치게 한다 모든 걸 털어놓아도 이미 알아서 모른다는 표정의 여자, 나를 닮아 나 같지 않은 몽골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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