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시인 / 초상집
상주도 잠이 들어 차일막엔 죽은 이 옛말도 들리지 않고 마늘밭 자리 비닐막 노름판만 불이 훤하다
술애비 금렬이아재는 만원 한장짜리 개끗발도 붙지 않는지 오늘도 흑싸리 개평꾼
묘자리에 물이 날까 지관 어른은 남몰래 걱정인데 길게 흐르던 별똥별 하나 들판 끝으로 툭 떨어진다
상여엔 두레 울력도 노래도 없구나 이백년 묵은 당산나무가 그 텅 빈 몸통으로 간신히 잎을 피워올리는 봄밤에
박영근 시인 / 내가 떠난 뒤
흰 낮달이 끝까지 따라오더니 여주 강물쯤에서 밝은 저녁달이 된다
늙은 비구 하나이 경을 읽다가 돌에 새긴 비문 속으로 돌아간 뒤에도 내가 바라보는 강물은 멈추지 않는다
내 안에서 오래 그치지 않는 그대 울음소리 강물이 열지 못한, 제 속에 잠겨 있는 바위 몇 개
나 또한 오늘 밤 읍내에 들어가 싸구려 여관 잠을 잘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떠난 뒤 맑은 어둠살 속에서 사라지는 경계들을 강물이 절집을 품고 나직하게 흐르기도 하는 것을 내 끝내 얻지 못한 강물소리에 귀기울이는 그대 모습을
이 강에서 하루쯤 더 걸으면 폐사지의 부도를 만날 수 있다
박영근 시인 / 저 꽃이 불편하다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 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 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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