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형 시인 / 실용적인 독서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자전거를 고삐처럼 매어놓고 내려왔다 책은 무슨 책, 바닷가 여관 비릿한 아랫목 똬리를 틀고 한 사나흘 앉았으니 남의 살 생각이 간절하다 시집 위에 냄비째 올려놓고 라면 먹을 때도 계란 생각 장자 위에 밥솥째 올려놓고 맨밥 먹을 때도 고기 몇 점 생각 창틀에 턱 올려놓고 밤새 바라보는 파도가 젖은 아랫도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읽히기도 한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두꺼운 책일수록 실용적이다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소를 잡아 먹는다
권현형 시인 / 밥이나 먹자, 꽃아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부음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뒤적거리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던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 번도 밥을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 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권현형 시인 / 스며들다
울음송곳으로 누가 자꾸 어둠을 뚫고 있나 한낮 산책길 저수지 수면에 어른대는 당신을 잠깐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밤새 환청에 시달린다
물이 운다는 생각 난생 처음 해 본다 그것도 동물성의 울음꽃떨기를 피워 깊이 모를 바닥에서 송이째 끝없이 밀어 올리는 듯하다
저수지 안에서 살아가는 황소개구리가 내는 소리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도 누구의 설움이 조금씩 누수되어 내게로까지 스며들었는지 그때 물이 울었다는 생각 거두어지지 않는다
권현형 시인 / 젖은 생각
마른 빨래에서 덜 휘발된 사람의 온기,
달큰한 비린내를 맡으며 통증처럼
누군가 욱신욱신 그립다
삼월의 창문을 열어 놓고 설거지통 그릇들을
소리나게 닦으며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며
나는 자꾸 기린처럼 목이 길어진다
온 집안을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리며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무 좋아 고백하는 내게
어머니는 봄바람엔 뭐든 잘 마르지 하신다
초봄 바람이 너무 좋아 어머니는
무엇이든 말릴 생각을 하시고
나는 무엇이든 젖은 생각을 한다
-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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