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이 시인 / 싸움의 기술
귀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덜커덩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지팡이를 흔들며 들어오네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은 딱 질색이야 내 혐오는 너무 질긴 게 탈이지 예고도 없이 불이 나간 객차가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만 실컷 울어보자고 결심했어 그러나 불이 켜지고도 나는 줄곧 울고 있었지 계략이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 스스로 호랑이라고 믿는 날랜 살쾡이 어느새 손바닥에 이겨 붙었던 흙먼지 탈탈 털고 휘파람을 부네 먼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귓속에 장착해 둔 그러나 고작 너는 눈 꼬리 긴 살쾡이 나는 차라리 우아한 패배를 원하네
귓속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명백하고도 무거운 이 바퀴를 달고 그리 슬프지 않은 저녁에 당도하고 싶을 뿐이야 가도 가도 캄캄한 울음 속을 그 남자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간다 결국 이 싸움의 패인은 울음이었으나 그렇다고 네가 이겼다는 증표는 아니야 어느 온순한 영화의 반전처럼 이 울음의 기차는 또다시 너라는 간이역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을 덮치게 될 것이므로
유정이 시인 / 커피볶는 시간
대개는 정교하다 모두의 옆모습 비트가 센 오션드라이브Ocean Drive*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 와 수월하게 건널 수 없는 것들은 때로 매혹적이야. 앞이 있으니 뒤가 있고 그러니 흔들어 볼래? 비벼도 좋아 벗어도 좋다는 말이지 소리를 지르며! 진짜처럼 울어볼래? 진짜라고 말해볼래?
낮과 밤처럼 그렇게 두 쪽으로 나뉘는 걸 택하지 그래 그걸 흠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래 그렇게 말해도 좋아 나와 나는 잘 벗겨지지 않아 설마 탈피가 쉽다고 말하는 거니? 맛과 향 어느 쪽으로든 끝까지 가야 한다면 뜨거운 쪽으로 가자 부서지는 곳으로 가자 잘 익은 비트 정점 다음에서 질러대는 소리
충분히 시끄럽구나 너는 그래그래 그렇게 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잘 구워졌다면 이제 뒤집어볼 시간이 되었다는 말이야 잘 빻아진 나를 헤집어볼 시간이라는 뜻이지
이제 말해봐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니?
유정이 시인 /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운동화 끈을 고쳐맨다 풀어진 끈에 매달린 불안한 소문의 머리채를 손가락에 걸어 단숨에 잡아당긴다 바닥을 디디자 단단해지는 길 그러나 버스는 오지 않는다 산양 전갈 페가수스의 머리칼을 다 세는 동안 운동화 둥근 코끝으로 바람의 혀가 한 차례 핥고 지나간다
언젠가 한 번은 지나쳤을 녹색 페인트칠 벗겨진 창가에서 마시던 차 한 잔 그러니까 결국 지나온 어디쯤의 금요일 같은 휘어진 길 그 너머의 생처럼 뒤틀린 브래지어 끈이 자꾸 등을 간질이는 동안 나는 수없이 오지 않은 버스를 놓치는 중이다
저녁에 닿기 위하여 죽은 나무가 제 몸을 훑으며 들려주는 휘파람 소리를 듣기 위하여 휘파람 소리 끝에 생겨난다는 우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기 위하여
끝내 결별할 수 없는 것들을 두고 당신이 저물도록 서 있던 마른 강물 끝 오래된 마을로 가기 위하여 둥글게 몸을 숙이고 다시 운동화를 고쳐맨다 오래된 당신이 단단히 묶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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