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림 시인 / 연한 새 잎 돋듯
몇 달째 거동 없던 이층집 할머니 조그만 창문을 열고, 마당가에 빨래 널고 있는 나를 내다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사람 소리 들응께 코에서 구신내가 난대이 살도 뼈도 없는 구신내를 씹는 양 빈 입을 오물거린다 푹 꺼진 눈두덩, 흘러내리는 광대뼈, 귀도 눈도 어두워진 할머니의 외로운 몸이 쫓고 있는 구신내 어려지고 어려진 한 짐승이 코를 킁킁거리며 찾아 헤매는 젖내 같은 살내 같은 구신내 살아도 너무 오래 살아 좋은 맛도 싫은 맛도 죽어버린 입 안에 연한 새잎 돋듯 침방울이 솟고 합죽하게 쭈그러진 입가에선 오월의 햇빛이 흰 거품을 게워내며 삭아내린다
임경림 시인 / 이번 생을 모르는 한 생이
그 해 봄, 우리는 불판에 삼겹살 구워 씹고 기름 냄새 번들거리는 입으로 지하 노래방에 갔다 흘러간 유행가를 목쉬도록 불러 젖히며, 생맥주 허연 거품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찬바람 맞으러 나간 강변, 봄풀 파랗게 돋는 그 비탈 아래, 식은 불판에 타다 남은 고깃덩이처럼 매달린 주검 하나, 흰 제복의 경찰 몇이 밧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번 생을 모르는 한 생이 우리 옆에서 잔인하게 죽어갔던 그 옆에서, 우리는 불에 덴 한 죽음을 슬픔도 없이 물어뜯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한 생을 턱 빠지도록 되새김질했다
-시인정신 2013년 가을호
임경림 시인 / 못 말리는 한국인
신라 낭백(浪伯) 선사가 수도하던 벽에 적힌 글에서 일곱 글자가 나왔다,
문을 닫은 자가 문을 열 것이다. (開門者是閉門人)
중국 장쑤성 진강(鎭江)의 금산사(金山寺) 이름을 법명으로 사용한 조선의 금산(金山)대사
스님 사리를 봉안된 만공탑은 한 번도 개방한 적이 없는데, 이번에 포쇄(曝曬)하면서 일곱 글자가 나왔다,
문을 연 자가 문을 닫을 것이다. (開門猶是閉門人)
어떻게 시공을 뛰어넘어 똑 같은 글이 나왔을까?
그 옆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여행자의 낙서가 있었다.
문을 연 자는 00당이고 문을 닫은 자는 00힘이다. 문을 다시 연 자는 새로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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