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낙추 시인 / 익모초
구월 초아흐레 지나고 첫서리 오기 전 어머니는 흥주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절집 근처에서 익모초를 한 자루 뜯어 오셨다 볕 좋은 날 그늘에 말린 익모초 몸이 냉한 여자의 입술 같은 푸른 잎과 폐경이 가까운 여자의 마른 이슬 같은 자주색 꽃에서는 가슴이 타는 어머니의 쓴 냄새가 풍겼다 여자는 어미가 되어야 여자니라 뱃속에 들어선 생명은 애가 아니라 부모니라 오이꽃처럼 노랗게 뜬 얼굴로 친정에 들락거리던 누님은 그해 겨울 내내 금계랍보다 쓴 어머니를 먹고 여자가 되었다 여자의 여자가 또 어미가 된 세월 몸에선 온기도 냉기도 돌지 않고 달마다 피던 이슬의 기억도 희미해진 아주 오래 묵은 익모초 한 그루 가을볕 아래서 여전히 어미 노릇을 하고 있다 *흥주사: 태안 백화산 자락의 작은 사찰
정낙추 시인 / 천리포의 봄
봄날 천리포에는 바다가 없다 바다는 천리 밖 아득히 물러서고 대신 은빛으로 치장한 까나리 떼들이 백사장에 드러눕는다 알 밴 보름달을 밀어내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체하지 못할 욕정에 끌려 천리를 마다 않고 달려온 까나리 떼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순간 사랑을 잃는다 다시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 눈을 크게 뜨지만 이미 몸은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바다는 벌써 다른 사랑을 키우고 있다 봄날, 천리포 모텔은 대낮에도 붐빈다
정낙추 시인 / 별꽃풀을 아시나요
가을에 튼 어린 싹 엄동 넘기더니 입춘 지나기 무섭게 다닥다닥 꽃 피운다 청천 하늘에 잔별두 많구요 우리 밭에는 지슴두 많구나 며느리 게으르다고 구박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었다는 별꽃풀 우리 집 여자 호미 들고 나설 때마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나이롱풀, 월남풀 희한하게 작명도 잘 한다 풀이름이 별꽃풀이란 내 말 척 받아 염병할 놈의 별풀인지 별꽃풀인지 꼴같잖은 게 이름은 예쁘네 징글징글한 웬수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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