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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선 시인 / 도박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30.

김경선 시인 / 도박

 

 

1,

그는 프로다

처음부터 내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정복자로서

내 삶 구석구석 구덩이를 파고 노상방뇨를 즐겼다

이랑 사이로 기미와 주근깨가 파편처럼 박힐 때마다

내 몸은 사막이 되고 모래바람이 인다

 

내 어느 봄날은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2,

시력을 반쯤 잃었다

어느 것이든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찌든 삶의 모퉁이에 모여들던 바람조차도

내편이 되 주지 않는다

거꾸로 매달려

캄캄한 어둠을 전이시키는 박쥐처럼

시력이 퇴화 되었다

엄마 이전에 아내 이전에

한 여자로 한 사람으로

가야할 길을 수도 없이 놓쳤다

태양의 아가리에 머리통을 쳐 박고

마지막 영혼을 놓고 올인을 꿈꾼다

 

내 생의 베팅은 이제 마악 바통을 넘겨받았을 뿐이다

 

 


 

 

김경선 시인 / 가난은 유전적 결함이 있다

 

 

발톱 색깔이 기억나지 않아요

털을 곤두세우고 연립주택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융자 많은 그린맨션 402호 창을 내 집처럼 넘나들어요

꿈속을 휘저으며 조상님 제사상 밑에 도사리고 앉아

어두웠던 이생의 장부 들춰내며 영민한 눈 무섭게 홀기곤 해요

무엇이든 주문만 해요

목숨도 담보로 잡습니다

유전자가 다른 뛰어난 사기꾼

즉시 매입 전단 명함처럼 내 놓고 능청스럽게도 발톱을 다듬지요

 

이 뻔뻔한 고양이를 고용한 발톱 큰 고양이가 궁금해요

정말 희대의 사기꾼 사를르 페로의 장화를 신은 고양이

그 후손인지 유전자 검사를 국과수에 의뢰해 봐야겠어요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말 거에요

네일 아티스트를 고용해 발톱에 매니큐어 발라 주는 척하며

목에 방울을 달아 달라고 주문할 테니까요

 

주택담보대출 이율대폭 인상이라는

비보가 날아들었어요

무이자 무이자라고 TV에선 떠드는데

발톱 자국 깊어 생이 화끈거려요

어리석은 죽음으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어젯밤엔 눈 질끈 감고 선반에 올라갔어요

거드름피우는 고양이 앞에 빈 그릇을 던졌지요

빨강럽스틱으로 떨리는 입술 감출 수 있었어요

영리한 고양이 킁킁 냄새를 맡고 있어요

가난은 사정거리 안에 있어요

 

 


 

 

김경선 시인 / 섬

 

 

물때는 가슴만 훑고 갔다

모도리 뭍을 건너는 영등 할미는

흰 매발톱 바닷소리가 됐다

 

때절은 파도를 이고

넋을 놓은 호동 문밖 가계회동 할망은

호랑나비 쫓던 실눈 가 마른 웃음으로

전설이 됐다

 

뭍은 가슴에 염주가 되어 그믐밤 물길이 열리고

바닷길이 훤히 보일 때까지

할망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도 무지개 꽃길을 따라 갔다

 

뿔치 맹돌숲 깊이까지 손을 흔들다

시렁가래 흰 적삼 얹어둔 낮달로

갈매 빛 섬꽃으로 피었다

 

 


 

 

김경선 시인 / 환생한 종이꽃처럼 창백하게

 

 

통증은 간헐적으로 온다

그가 전한 안부에 오한이 딸려 온다

욱신욱신 파고드는 한기,

 

혼잣말로

몸살이라고 말하다가

미열이라고 고백한다

 

달콤한 말들은 심장을 찌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존재를 알리는 종족의 관습을 기억한다

 

신이 게을러서 목을 축일 수 없었노라 우기던

그가

자신의 피로 목을 축였다던

그가

환생한 종이꽃처럼 창백하게 다가왔던

그가

 

손톱 밑에 박혀 계절을 갉아먹고 있다

 

 


 

 

김경선 시인 / 손톱

 

 

그의 뿌리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살아 꿈틀거린다

밥을 먹을 때도 잠 잘 때도 소리 없이,

 

평생 잘라도

자르지 못할 뿌리가 숨어있다

 

열 개의 반달을 나는 수없이 장사를 지냈다

죽은 달을 봉투에 담아 담 밑에 묻었다

그런데 달을 묻은 자리에서

손톱자국처럼 담쟁이가 기어올랐다

 

붉은 손가락들

담벼락에 찍힌 지문은

누구의 것일까

 

가끔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뿌리가 잘린 천 개의 손들

담벼락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저것은 손톱의 힘

 

손의 말을 듣는 밤

내 귀는 보름달만큼 커지고 있다

 

또 달이 자라는 소리

점자를 읽는 손가락에 눈이 달린다

 

 


 

 

김경선 시인 / 제3병동

 

 

우리 인사나 하고 지내요

저는 사십 년 전에 장기 입원을 했죠

당신도 병명을 모르시나요?

엄마의 슬픈 눈빛을 보면 불치병인 게 분명하지만

저는 병명이 뭔지 몰라요

크고 작은 꿈을 풀어 놓고

기진맥진 벌거벗은 몸은 진땀을 흘리고

영혼조차 애벌레처럼 링거액 속으로 기어들어가 종일 잠만 자요

검사를 하는 날은 금식을 해야 해요

맛깔 나는 욕망도 눈 딱 감고 뱉어 버려야 해요

어린 날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으면서

두꺼비에게 소원을 빌었어요

아이가 어른을 꿈꾸고

어른이 아이를 추억하는 지금까지

병명도 모른 채 입원실에서 먹고 자요

나는 아직도 두꺼비와 노는 도시를 세우고 있어요

오늘은 링거병을 깨고 싶을 만큼 어깨가 흔들렸어요

의사 말이 딸아이에게도 흡사한 유전자가 발견 되었대요

당신도 날마다 꿈을 꾸나요?

저는 지구라는 제3병동에 장기입원했어요

태어나자마자 시한부 판결을 받고

지금껏 살고 있어요

 

 


 

김경선 시인

인천광역시 옹진군 출생. 2005년 《시인정신》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미스물고기』. 계간 『시인정신』 편집위원 역임.  제10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현재 『젊은시인들』 편집장. 계간 시인정신》편집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