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웅 시인 / 불립문자
세상엔 어느 짧은 사이나 출렁이는 물의 틈을 증명하고 감쪽같이 사라지는 문자들이 있다 붓이나 필기구를 사용하는 명필의 문자가 아니라 썰물 빠진 그 사이에 펼쳐지는 불립문자(不立文字)들 온 몸으로 기어간 흔적과 다족류들의 행적들이 괴발개발이다.
썰물로 펼쳐지고 밀물로 거두어지는 종이 한 장인 개펄, 옆으로 걷는 문자와 연체(體)의 필체로 유연한 초서체(草書體)들
그러나 밀물이 들면 일제히 모래 속으로 숨어버리는 문자들 얕은 물결에도 쉽게 지워져 버리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펼쳐지는 물의 왕복과 비릿한 일생들의 짧은 사초(史草)다
누군가 읽은 적도 어떤 체본도 없는 문자지만 갈매기 울음소리를 그중 두려워한다고 한다
박무웅 시인 / 밥 속에 생(生)과 사(死)가 있다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온몸이 날카롭게 진화한다. 눈빛이 칼날이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간다 한 끼의 밥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득한 낭떠러지로 밀린다
양계장의 닭들이 달려든다 모이 앞에 사력을 다한다 후려치는 막대기에 모가지가 두 번 세 번 감겼다 풀려도 다시 달려드는 식욕
한 끼의 밥에 머리를 굽힌다 부끄러운 손을 잡는다
체중을 줄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밥의 의미를 다시 적는다
밥이 내 인생을 먹는다
-『예술가』 (2012, 겨울호)
박무웅 시인 / 못의 길
못의 길이란 결집結集이다
그 견고한 집 한 채를 지으려고 수없이 많은 망치소리를 이음새 마다 박아 넣는다 그리고 세월을 견딘다
묵묵히 문들을 관리하거나 사람의 들고 나거나 죽고 태어나는 그 수를 센다
하나의 못이 나무속에서 오래 박혀 있는 것은 못의 끊이지 않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불화는 삐거덕거리지만 못은 나무를 물고 무너지지 않는다
박혀 있는 못들이란 꽝꽝 망치에 맞은 존재들 곰곰이 맞은 이유를 오래오래 캐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못들의 대답들이란 헐렁한 소리들이 전부겠지만 그 헐렁한 소리들이 얽히고 설키면 그 또한 결집이 된다
-시집 『패스 브레이킹』 2020. 시와표현
박무웅 시인 / 숨은 그림
사무실엔 한 폭의 황산이 걸려 있다. 얼마 전 여행에서 사온 먹빛 산이다 세관에선 액자만 살피고 산봉우리 몇 개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기암절벽과 수천 그루의 소나무와 바람은 무사통과 되었다. 전설의 장사(壯士)처럼 바위 많은 산 하나를 통째로 들고 왔다 그날부터 즐거운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오르던 산 대신 그림 속 일만 계단을 오른다. 반갑지 않은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슬쩍 그림 속 소나무 뒤로 숨곤 한다 그럴 때마다 보였다 돌을 지고 오르던 옛 석공과 구름이 쉴 새 없이 피어나오는 신비한 바위와 세상의 모든 새를 품고 있다 날려 보내는 포란의 고목 하나를 숲 속에서 보았다. 삭발한 자의 속죄가 숨어있고 몇 천 년을 소리 내지 않고 엎드려 있는 짐승 한 마리를 보았다 그림 밖을 나오면 쉼 없이 절벽을 깎는 소리가 시계 속으로 들어가고 날개가 부러진 빈 바람 소리가 선풍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알았다 큰 산 하나를 뒤질 수는 있어도 작은 그림 속은 쉽게 뒤질 수 없다는 것을 한참 동안 그림 속을 살피다 가는 사람들 저마다 황산 숲 속에 무언가를 숨겨놓고 간다는 것을
박무웅 시인 / 별어곡
정선선 완행열차를 타고 험준한 산과 굽이진 강을 따라가다 보면 도토리 깎지를 닮은 조그만 간이역이 있다. 세상의 첩첩산중들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두꺼운 책갈피 넘기다 만난 흑백의 삽화揷畵같은 별어곡 오래전 나는 그곳에서 미처 이별할 장소를 찾지 못해 미루어 두었던 미련과 집착들을 버렸다.
이별하기 힘든 것들과 이별하는 골짜기 날마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찾아와 오래전 날짜가 찍힌 기차표를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치매에 든 할머니가 있고 한때 검은 흥망이 회색빛 구름으로 지나가는 곳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역 번성했던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만남과 이별을 했을 깊은 굴곡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별어곡역 광장 억새이야기조형물이 세월의 무게와 이별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시인협회 2021. 사화집 《역》
박무웅 시인 / 시작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에게 주어진 시작과 끝의 횟수가 동일하지 않다는데 내겐 시작이 더 많았을까 아니면 끝이 더 많았을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궁금증을 뒤져보면 남아있는 끝의 개수는 알 수 없고 다만 시작은 꽤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작은 지금 당장 실행해도 될 것 같고 또 어떤 시작은 때를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새로 발견한 시작 하나를 들고 이 봄밤을 잠 못 이루는 것이다 지나온 생을 돌아보면 험난했던 시작들과 영예로웠던 끝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시작을 찾고 또 찾는 것이다 끝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다 팽팽하고 질긴 시작 하나를 골라서 시위를 매고 힘차게 당겼다 놓으면 시작은 저 멀리까지 순식간에 날아가 꽂힌다. 나보다 더 나를 앞질러가는 끝을 저 멀리까지 보내놓고 나는 또 천천히 그곳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모든 가을은 봄에서 시작되었고 또 모든 봄은 겨울에서부터 걸어온 것이니 꽃피는 일을 시작하고 열매 따는 끝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두근거리는 시작 하나를 골라 들고 오랜 궁리를 싹틔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시와정신』 (2022, 여름호)
박무웅 시인 / 지상의 붕새
그날 내가 본 백목련은 바람에 날리는 흰 깃발이며 붕새의 부리가 토해 놓은 시(詩)였다 깃털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은 죽은 새이다 날지 못하는 것은 생(生)이 아니다 이른 봄 가장 먼저 날개를 펴는 새처럼 지상의 나를 버리고 붕새가 되고 싶었다 그날, 나는 백목련 앞에서 날개를 펴고 흰 깃털로 구만리 장천을 긴 울음과 함께 날아오르는 한 마리 붕새가 되고 싶었다 말의 첫 머리를 가장 먼저 피워내는 흰 백목련 같은 지상의 붕새 같은 시(詩)를 토하고 싶었다. -시선집 『지상의 붕새』(시월출판, 202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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