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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1506-1552)

by 파스칼바이런 2010. 4. 29.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1506-1552)

축일 12월 3일

 

 

 

동방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서구 열강의 정복 민족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 골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부분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따라 한 분뿐이신 임금께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Navarra)의 하비에르(Javier)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던 1534년에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1537년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받아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1541년에 성 이냐시오의 권고를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로 가서 선교하였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는 인도(1541-43,48,51-52년)와 스리랑카(1544-45년), 몰로카스 제도(1545-47년) 그리고 일본(1549-51년)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활동적인 모습은 그리스도교 모든 젊은이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정열을 쏟으라는 격려가 된다.

그는 1552년 중국으로 들어가던 도중 상찬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교황은 이냐시오에게 포르투갈의 요한 3세의 요청에 따라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인 들에게 두 명의 예수회원을 보내라고 했다.

이냐시오는 보봐딜리아와 시몬 로드리게즈를 뽑았다.

그러나 보봐딜리아는 병이 났고 이냐시오는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를 그 대신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540년 3월 15일 포르투갈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동양을 향해 리스본을 떠나는 함대를 놓쳤다.

 

1년 뒤에 포르투갈의 왕은 리스본에서 두 명의 예수회원이 다음 배를 기다리면서 한 일을 보고 학교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로드리게즈에게 포르투갈에 남아 있기를 요청했다.

로드리게즈는 인도로 가지 않았다.

1541년 4월 7일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홀로 인도의 고아를 향해 유럽을 떠났다.

그리고 첫 번째 선교사 예수회원이 되었다.

 

(예수회홈에서)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인 팜플로나 교외에 있는 사비엘 가족성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1528년에 학위를 받았으며, 거기서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냐시오 로욜라를 만났다.

처음에는 이냐시오의 생각에 반대했던 그가 일단 생각을 바꿈으로써 예수회의 창설 회원 7명 가운데 들게 되었다.

그들은 1534년에 몽마르뜨에서 첫 서원을 발하였다.

 

그는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들과 함께 베니스에서 서품되었고(1537년), 그 다음 해에 로마에 파견되었으며, 1540년에는(예수회가 공식 승인을 받은 해), 그와 시몬 로드리게스 신부가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리스본에서 발이 묶였다.

왜냐하면 국왕 요한 3세가 로드리게스 신부는 남으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프란치스꼬는 8개월을 할 일 없이 지내다가, 1541년 4월 7일에야 떠났는데, 이때는 교황으로부터 인도의 교황 대사 자격을 부여받은 뒤이다.

그는 13개월 후에 고아에 도착하였고, 5개월 동안은 병자와 죄수들을 찾아보는 일과 어린이의 신앙 교육 및 그곳의 포르투갈 인들의 비도덕성을 바로잡는 일부터 착수하였다.

그 후 그는 인도의 남단인 케이프 코모린에서 3년을 지내면서 파라바스인들을 사목하여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1545년, 그는 말라까를 찾아갔고, 또 1546년부터 47년까지는 뉴기니아에 인접한 몰루카스와 모로타이를, 1549년부터 51년에는 일본까지 왕래하였다.

그는 인도의 첫번째 관구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중국에 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안토니오라는 중국인 청년과 복음을 전하려고 출발하였으나 상치안 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대륙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흔히 그는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고, 그 자신이 개종시킨 교우수만 하더라도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며, 1622년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으며, 비오 10세에 의하여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부산교구홈에서)

 


 

축일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