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생애 (1506-1552)

by 파스칼바이런 2010. 4. 29.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생애 (1506-1552)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Navarra)의 하비에르의 성1)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Juan de Jaso)는 1516년 하비에르가 10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어려워진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로써 명예와 부를 한 몸에 지녔던 분이셨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존경받는 분이었고, 은근히 가족들은 하비에르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한편, 하비에르 부모님은 5남매를 낳았는데, 그 중에서 하비에르는 막내였다.

 

당시에 나바라는 까스띠야 왕(Carlos V)국과의 전쟁 중에 있었고, 하비에르의 두 명의 형(Miguel과 Juan)들은 전쟁에 나갔고, 어린 하비에르는 어머니(Maria de Azpilicueta)를 돕고 있었다.

동시에 집안의 경당(웃고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에서 기도와 공부에 주력했다.

하비에르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에 누나 막달레나는 Gandia의 관상수녀회에 입회를 했었다.

 

한편, 전쟁이 끝났을 때 두 형은 집으로 돌아와서 하비에르에게 군인이 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법학자가 되려고 했다.

 

18세까지 그는 빰쁠로나에서 성장하면서 내적으로 강한 청년이 되어갔다.

그리고 사냥과 수렵 등을 취미로 하면서 육체적으로도 강인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고등학교를 빰쁠로나에서 마치고 그는 당시에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파리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났다.

 

어머니와 이별을 한 뒤에 말을 타고 3주 동안의 여행을 한 끝에 파리에 새로운 정착을 했다.

그리고 도착을 해서 보니, 이미 그곳에는 다른 유럽에서 공부를 하기위해 온 400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저마다 자신들의 꿈들을 키워가는 모습이 분주해 보였다.

본인이 원하던 곳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지 하비에르에게는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어서 성적도 좋았다.

동시에 성격도 낙천적이었고, 운동을 좋아해서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미래에 멋진 사업을 통해서 큰 명예와 많은 돈을 버는 것에 부풀어 있었으며, 친구들 중에는 허영심이 많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밤에 흥청거리며 노는 것에 기울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집을 떠나올 때의 어머니 모습과 아들에 대한 기대를 자신이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는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씩 빠리 생활에 더 익숙해져가면서 몇몇 친한 동료들이 생겨났다.

현재 공부하고 있는 빠리의 소르본느라 불리는 대학에서 파브르라는 친구, 이태리와 프랑스의 국경지역출신이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 중에서도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이냐시오 로욜라’ 라는 스페인 바스크지방에서 온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매우 친절하지 않은 사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냐시오라는 동료는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또 자신의 그릇된 과거에 대해 들려주면서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기도하는 방법(영신수련)과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하비에르에게는 내적인 갈등이 일어났다.

이냐시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들과 충돌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꾸만 이냐시오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들이 모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냐시오의 질문이 보다 깊게 하비에르에게 던져졌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마태 16, 26)

즉, 예술가의 손에 다듬어지기 위해 들려진 작은 나무 조각처럼 단단했던 하비에르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게 될 무렵에는 동료들(IG?NACIO, FABRO, JAVIER, LAINEZ, SALMERN, BOBADILLA Y RODRIGUEZ)과 매우 친하게 되었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향했다.

모두가 사제수품을 받고, 예수회라는 이름으로 한 형제들이 되었다.

 

한편 이들의 로마여행은 쉽지 않았다.

걸어서 그것도 구걸해 가며 돈 한 푼 없이 이루어진 로마행은 대학 공부할 때의 초롱초롱했던 하비에르의 모습이 아니라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작은 빵 한 조각에 온 마음이 가 있는 인간적인 한 걸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로마에 도착해서 그들은 당시의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원의을 아뢰고, 그에 대한 윤허를 구하고자 했는데, 터어키와 베네치아의 전쟁의 원인도 있었고,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교황 바오로 3세는 예수회를 인가하게 되었고, 보다 실질적인 신원이 현실화 된 것이다.

한편 당시에 스페인과 포르투갈2)은 대외적으로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 5세와 포르투갈의 국왕 후안 3세는 동양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 가면서 동시에 선교사들을 동반하지 못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이냐시오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이냐시오는 그 뜻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바로 병으로 눕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이 원했던 그 일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였다.

파견을 받기까지 24시간의 식별도 그에게는 길었던 것이다.

 

예수회가 정식으로 인가를 받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수도회로서의 면모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비에르는 첫 번째로 파견을 받고 떠나는 것이었다.

 

그의 여행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당시에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미리 유언장을 써놓고 길을 떠나고 있었고, 하비에르가 떠날 무렵에 이미 모잠비크에서는 80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뱃길이 위험했고, 각종 질병과 추위 그리고 음식 등등이 죽음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했어야 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단 하루도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세상의 모든 황금을 준다고 해도. 하지만 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했었다."

 

마침내 그는 인도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과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분명했던 것은 문화가 그만큼 달랐지만 사람들과 다른 언어 사이에서 편안하게 있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큰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생각 되었고, 또 그렇게 되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 들려 있었고, 그 종을 흔들면서 어른, 어린이들을 부르며 거리를 활보했다.

하비에르는 이런 상황을 그의 서간에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이 회심을 하기 시작했고, 종을 흔들던 손으로 세례를 많이 주었기 때문에 지쳐있었다."

 

한편 하비에르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경험(인도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교리를 병행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병자들과 나환우들을 돌보셨고, 죄인들을 도와주셨으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셨다." 라고.....

 

인도에서 몇 년간 체류한 후에 하비에르는 Malaca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에서 보낸 한 달여의 위험한 여정을 이겨낸 후, Malaca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에서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품행이 그렇게 바르지는 못한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하비에르는 그들의 물질적인 부유함과 다르게 반대로 아주 허름한 초막을 지었다.

 

어느 날 밤에 하비에르가 자신의 초막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무릎을 꿇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그 사람들은 엿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다음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돌을 베개 삼아 사용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그는 자신의 초막에서 나와 Malaca의 언어로 설교를 하고, 그의 얘기를 경청했던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하고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었는지.... 하비에르의 이런 선교 활동 안에서 치유와 작은 기적들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

 

Malaca에서 다시 하비에르는 Molucas의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종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응하지도 않았고, 모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그는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언덕위로 계단을 타고 오르는 것처럼 올라가야 했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노래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하비에르는 그 주민들의 언어로 교리도 가르쳤고, 음악도 가르쳐주었다.

 

한편 주의 기도와 계명에 대한 것을 음악으로 가르치고 그들에게서 듣는 것(반응)은 하비에르 자신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한편 하비에르는 Molucas에서 있었던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처참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고, 모로(Moro)인들의 무서운 섬에서도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해독제를 받아들이는 것도 없이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을 다하여 선교활동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비에르는 선교활동에 대한 신념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때문에 그의 열정적인 선교에 대한 투신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향하는 항해를 계속했다.

이번 선교지 역시 그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의 황실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당장 세례는 몇 백 명 정도를 넘지 못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우선 그에게는 더 많은 수천 명의 일반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박해와 조롱 그리고 경멸을 받으면서도 낡은 그의 수단(수도복)을 벗어버리고 일반인들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예를 갖추고 황실을 방문하여 선물까지 하였다. 그 방법이 그들에게는 매우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비에르가 생각하기에 “먼저 대중국을 회두시켰더라면 일본은 그리스도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그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중국으로 향할 생각을 굳히고, 상뚱반도(Canton)의 관문이 바라보이는 상춘섬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으로 들어가려던 많은 외국인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비에르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질 않았다.

하비에르는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중국인 어부 한사람을 포섭하여 돈을 지불하고 그의 배에 숨어서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어부는 돈만 받아 챙기고, 하비에르와의 야속을 저버린 채 나타나질 않았다.

 

어느새 겨울이 되었고, 섬은 점점 황량해져갔다.

즉 오가는 사람의 발이 끊긴 것이다.

하비에르는 다른 배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허사였다. 섬에는 몇 명의 열심한 신자들과 하비에르만이 남아있었다.

 

그 중에서 중국인 안토니오(Antonio)와 인도 사람 크리스토발(Chritoacutebal)이 하비에르의 죽음을 지켜주었다.

그는 혹독한 폐렴으로 작은 초막에서 중국선교의 꿈을 접은 채 세상을 그렇게 떠났다.(1552년)

그의 눈은 중국을 응시하고 있었고, 예수와 성모마리아를 부르면서 생을 마감했다.

 

주)

1) 하비에르 성은 나바라의 왕을 위한 전쟁의 장소였고, 많은 전쟁을 치루어 낸 곳이다.

2) 포르투갈 예수회 설립, 1546년 - 스페인보다도 1-2년 정도 먼저 설립 2002년 예수회 스페인 관구 자료집에서

 


 

축일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