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양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두말할 것 없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일 것이다. 그는 1506년 4월 7일에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인 팜플로나 교외에 있는 사비엘 가족 성(城)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히 당신 국내에는 전란과 기타 재화가 계속되어 가정은 차차 쇠퇴했으나, 그래도 양친은 자녀들의 교육을 등한시하지 않고, 특히 프란치스코를 파리에 보내어 대학에서 고등 지식을 연마케 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빈곤한 처지에서도 앞날의 입신출세를 꿈꾸며 부지런히 학업을 계속했다.
그때, 같은 대학에 성 이냐시오가 있었다. 그는 프란치스코와 베드로 파브르라는 학생과 같이 한 지붕 밑에서 지냈는데, 그때부터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하고자 유능하고 경건한 동료를 물색하던 중 프란치스코를 만나, 하루는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마태 16, 26)하신 성서 말씀을 들어 그의 속을 떠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그 말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에 심사숙고한 끝에 그 말씀 속에는 참으로 엄숙한 진리가 들어있음을 깨닫고, 마침내 1533년 이냐시오에게 지도를 청하고 그를 영적 아버지로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네 명의 동료를 얻어 6명이 새로운 수도회인 예수회를 조직하고 8월 15일의 성모 승천 대축일의 경사스러운 날을 택해 몽마르트 성당에서 청빈과 정결의 서원을 바치고 팔레스티나의 순례를 기약했다.
그 뒤 방학을 맞은 하비에르는 40일간 묵상하며 준엄한 고행 생활을 했다. 그 이후 그의 머리에는 다만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 사업에 종사하는 것만이 들어 있었다. 하비에르는 우선 다른 형제(수사)들과 더불어 이탈리아에 갔다. 그것은 전에 기약한 팔레스티나에의 순례를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불행히도 그 계획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하비에르는 잠시 베네치아에 있는 어떤 병원에서 불치의 환자를 간호하고 얼마 후 동료들과 같이 로마로 향했다. \어느 날 밤, 그가 한명의 인도인을 안고 가다가 너무 무거워 넘어진 끔을 꾸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동료에게 이야기했는데, 얼마 후 그 꿈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즉 1537년 6월 24일, 하비에르가 다른 4명의 회원들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포르트갈의 국왕은 그 나라 식민지인 인도에 예수회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이냐시오에게 요청했으므로 두 명의 형제를 보내기로 했는데, 그 중 한명이 신병으로 눕게 되어 하비에르가 그 임무를 대신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사절(使節)이라는 칭호를 받고 1541년 4월 7일에 출발했다. 이 사절의 여행은 쓸쓸하고 아주 초라했다. 그러나 겸손하여 다른 이의 힘은 일절 바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 노력했다. 배 안의 여객들은 그의 겸허하고 친절함에 감복되어 자신들의 좋지 않은 행동을 삼가 하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13개월 후에 인도령 고아에 도착하자 곧 활동을 개시했다. 그곳의 시민들은 종교적, 도덕적으로 매우 한심스러울 뿐 아니라, 풍속마저 그리해 갖은 죄악을 범하고도 보통으로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성인이 그곳에서 활동을 시작한 후 수개월이 경과하자 모든 것이 현저하게 개선되어 갔다. 성인의 교훈 또는 그의 실천에는 아무도 항변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비에르가 인도에 온 것은 그런 신자들을 위해서보다 오히려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였다. 인도말을 모르는 그는 해변에 집단 거주하는 어촌에 들어가 통역을 통해 전교 활동을 했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어 영세자가 매달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 한다.
한편 그들의 가난한 생활고에 동정을 금할 길이 없어 때로는 열렬한 기도를 했더니, 하느님께서도 가상히 여기시어 기적을 행하게 하셨으니, 이것 역시 전교 상 성공의 큰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매일 같은 열렬한 전교 활동을 하면서도 극기, 고행의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단식지를 지키고 가끔 철야 기도를 했다. 하느님께서도 그의 이 거룩한 생활을 기꺼이 여기시어 보수로 천상적 위로와 환희를 주셨다.
1545년에 해안 지방에서 전교에 크나큰 성과를 거둔 하비에르는 다시 말라카를 찾았고, 또 1546년부터 47년까지는 뉴기니아에 인접한 몰루카스와 모로타이 지방에 갔다. 도중에 두 차례나 위험한 조난을 겪고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했으나 끝끝내 그 원거리 여행을 단행했다. 그의 기도, 고행, 기적은 계속 되었다. 하느님께서도 끊임없이 천상적 환희를 주셨다.
몰루카스 지방에서 말라카에 돌아온 때였다. 그는 사또미 야지로오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이 사람은 본국에서 추방되어 그곳에 온 사람이었다.
하비에르는 그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또한 그 사람을 통해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요 주민들은 모두 선량하다는 말을 듣고 그 나라로 향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시 고아에 파견되어 있던 포르투갈 국왕의 대리인 총독의 허락을 받고 1549년 6월 24일에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어려운 고비를 거듭한 항해를 마치고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은 그해 8월 15일이었으며, 야지로오도 동반했다. 하비에르는 즉시 전교에 착수했으나 예상한 바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고시마 영주는 그에게 전교의 자유를 주었으나 그의 설교를 듣는 이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다시 북쪽으로 가볼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야마구치에 당도했다. 그곳에서의 전교는 약간의 희망을 보여 주었다. 그는 영주 오오우치 요시다카에게서 한 절간을 기증 받아 이를 교회로 사용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수도에서 젼교하기 위해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교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오오닌(應仁) 이래의 내란으로 인해 인심이 어지러웠으므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서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1551년 11월 4일 일찍이 일본을 떠났다. 체류 기간 불과 2년 반, 그동안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야마구치였다. 그의 체류 기간은 짧았으나 일본의 사도임에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였고, 일본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공로자인 것이다. 그는 일본을 떠남에 앞서서 다른 선교사에게 사업을 인계했다. 그는 일본 국토를 좋아했고 일본을 잊을 수 없어 상부에게 끊임없는 서한으로 그 후계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독촉했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부가 계속 들어오게 되고, 일본 남쪽에서 북쪽까지 많은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이 같은 융성을 초래한 것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의 선물인 것이다. 그는 후에 중국에 전교하려고 광뚱(廣東)에 가까운 산첸(山天) 섬에 이르러, 그곳에 체류하며 대륙에 들어갈 편의를 찾던 중 잠시 한 명의 중국인과 마라바라인인 한 신자와 셋이 어느 초막에서 구차한 생활을 하며 대기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4일 동안 고투하면서 항상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윗의 후예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를 취후로 46세의 나이에 성스러운 생애의 막을 내렷다.
유해는 고아에 이송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패되지 않아 얼굴이 산 사람과 같다 한다. 그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며, 1622년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으며, 비오 10세에 의해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제게 약속하신 천국을 원하기에 당신께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지옥이 그만큼 두려워서 당신께 저를 내어드리고, 저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당신께로 향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주님, 당신께서 조롱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도록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당신의 몸이 그만큼 상처 입으신 것을 보도록 해 주시고, 당신이 모욕 받으셨고, 죽으신 것을 보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 마지막까지, 오로지 당신의 사랑, 당신의 방법으로 비록 천국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주시고, 비록 지옥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께서 제게 사랑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제가 기다린다 하더라도 오지 않을 수 있고, 이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는 사랑합니다.
'동방의 사도' 하비에르 성인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삶과 영성
인도와 일본에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해 '희망봉부터 인도와 중국, 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북(北)스페인 바스크족 출신이다.
그는 몰락한 가문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당시 유럽 최고 대학인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 개인 영광에 목표를 두던 그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 나라 영광'으로 돌아선 것이다.
1529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534년 8월 성 이냐시오를 포함한 다섯 동료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위 순교자성당에서 '예수회'를 설립한다.
그 후 1541년 포르투갈 왕 요청에 따라 교황의 동방특사 자격으로 리스본을 떠나 1년 뒤 포르투갈령 동인도 수도 고아(Goa)에 도착, 3년간 전교활동에 전념한다. 1545년 9월경 말레이반도 믈라카(Malacca)에 상륙한 그는 이듬해 1월 뉴기니아섬 서쪽 몰루카스제도를 방문하고 믈라카로 돌아오다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세례를 준다. 그리고 3년 뒤 그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2년 3개월간 복음을 전파, 일본교회 복음화에 큰 영향을 준다.
일본에서 복음를 전파하던 중 중국이 아시아 문화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중국 선교로 목표를 수정해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나 믈라카를 거쳐 이듬해 인도 고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 상치안 섬에서 약속된 안내자를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1544년 1월15일 인도에서 쓴 그의 편지에 그의 삶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주여,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소서."
서울 하비에르 국제학교 엘렌 르브렝(헬레나, 71) 교장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영성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조건없는 신뢰'"라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으로 흔들림이 없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문명숙 교감은 성인에 대해 "교황 특사 자격으로 인도와 일본을 방문해 전교에 앞장섰던 성인께서 가져간 것이라곤 수단과 성경책 뿐이었다"면서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 맨발의 성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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