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성인] 순교자 성 야누아리우스(+305) 윤 클레멘트 신부
그는 살았던 생애보다도 더 그가 남긴 순교의 피의 액화(液化)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떤 면에서 우리 교회의 성인들의 생애는 그들이 남긴 영적 혹은 외적 유산을 통하여 전하여 온다고도 볼 수 있는데, 야누아리우스 성인이 바로 그와 같은 예이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는 나폴리 동쪽에 있는 베네벤토(Benevento)의 주교가 되는데,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은 303년의 디오클레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있던 때였다. 어느 날 그의 교구 두 부제와 두 교우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때의 상황이 매우 어려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교구에 속한 그들을 감옥으로 찾아갈 용기를 갖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감옥에 같이 찾아갔던 믿음의 동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는 죄목으로, 황제의 관리들에게 바로 체포되어 온갖 심문을 받고 고문도 받는다. 그 다음에 그와 동료들은 거친 짐승들에게로 던져진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그와 그의 순교 동료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 그런 기적의 일들이 있고 난 후, 그와 동료들은 이번에는 목 베임의 순교로 하느님과 신앙을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바친다.
그가 순교하고 난 후 그의 유해는 나폴리, 베네벤토, 베르지네, 그리고 1497년에는 베니스로 차례로 옮겨지고 모셔진다. 그런데 그의 유해가 베니스에 도착한 1497년에 역병의 재앙으로부터 그 도시를 구했다고 사람들은 믿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1389년부터는 그의 유해에서 순교 당시의 피가 액화된 형태로 변형되는데, 그의 액화된 피는 그보다 훨씬 전인 그가 순교 후 콘스탄틴 황제 때에 나폴리로 유해가 옮겨질 때부터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나폴리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일 년에 세 차례의 축제를 지낸다. 즉, 그의 유해로부터 순교의 피가 액화의 형태로 변형된 날을 기념하는 5월 첫 토요일, 그의 순교기념일, 그리고 1631년의 베수비우스의 위협적인 화산폭발을 피했던 날 등이다.
위 세 날들에는 그의 유해가 나폴리 주교좌성당의 아름다운 경당에 어둡고 굳으며 불투명한 덩어리인 채 모셔진다. 유해가 모셔진 날들에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동안 사제는 가끔씩 유해 덩어리를 위아래나 반대쪽으로 위치를 바꾼다. 이때에 유해는 때에 따라서 빨간 피의 액화된 상태로 변한다. 그러면 사제는 떼데움(찬미가)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열에도 녹지 않고 90도의 온도나 혹은 영하의 기온에도 그 액화된 피가 변하지 않는 이 기적을 그 누구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 현상은 하나의 신비(神秘)로 말해지는데, 그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께 믿고 기도하며 바라는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성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베네벤토의 주교로서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 나폴리에서 자기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 나폴리에서 공경 받아 오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340,1: PL 38,1483-1484)
나는 여러분에게 있어 주교이고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주교직의 짐을 내 어깨에 떠맡은 이래(그에 대해 상세히 셈 바쳐야 합니다.) 이 직위에 대해 항상 염려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직위 수행에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여러분의 구원에 유익이 되는 것보다 거기서 나오는 영예를 구하고 즐기는 그런 위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 대한 책임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한편 여러분과 함께 있음을 생각 할 때 위로가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있어 주교이고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내가 받은 직위를 뜻하고 후자는 내가 받은 은총을 뜻 합니다. 전자는 위험을 내포하고 후자는 구원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우리 직위의 수행에서 일어나는 폭풍 때문에 광대한 바다 위에서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피로써 구속되었나를 되새길 때 이 생각은 우리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잔잔한 항구에 들어가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직분에 진력하면서도 거기에서 나오는 공동의 혜택은 위로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여러분과 함께 구원받았다는 생각은 내 마음을 더 즐겁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여러분과 같은 형제가 되게 한 그 구속의 은혜에 배은망덕한 자로 보이지 않고 주님의 명에 따라 여러분의 참된 봉사자가 되도록 나는 더욱 힘써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구세주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되살려 나도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주께서는 이 말씀을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하심으로 먼저 그에게서 사랑을 구하시고 다음으로 그에게 짐을 부과하셨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짐은 그만큼 더 가벼워지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내가 그분의 양 떼를 침으로써 그분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앞서 만사를 행하신다면 어떻게 내가 그런 일로 인해 주님께 보답해 드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양 떼를 보수 없이 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은 보상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순수한 사랑으로 양떼를 친다고 하면서도 한편은 그 일 때문에 보상을 구함은 모순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보상이 사랑받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기만 하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일할 때에도 사랑 받고 있는 사람에게서 보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양 떼를 침으로 그분에게서 받은 구속의 은혜를 갚아 드리려 한다면, 우리를 양 떼의 목자로 세워 주신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악한 목자라면 (그렇게 됨을 막아 주시기를! 우리의 사악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착한 목자라면 그렇게 되게 해주시기를!) 그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말기를 간절히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밭"인 만큼 우리 직위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직위가 되게 해주십시오. 외적으로는 심고 물주는 사람을 영접하고 내적으로는 자라게 하시는 분을 영접하십시오. 내 기쁨이 여러분을 다스리는 데보다 여러분을 섬기는 데에 있게끔 기도와 순종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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