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1) 6세때 신비체험 후 일생을 주님께 봉헌
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은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코린 1,25)
카타리나 성녀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이 아니다. 글조차 읽고 쓸 줄 몰랐다. 글을 배운 것은 선종 3년 전이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강론 등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옮겨 쓴 것이다.
그런데도 교황 바오로 6세는 1970년 카타리나를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와 함께 교회 학자로 세웠다. 카타리나는 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당시 혼란스럽던 교회를 바로잡는데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그의 일생부터 알아보자.
카타리나는 흑사병이 이제 막 유럽에 번지기 시작하던 1347년 주님 탄생예고축일에, 염색업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베닌카사 가문의 자녀로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카타리나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6세 때는 성인들에게 둘러싸여 옥좌(玉座)에 앉아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축성을 받는 신비 체험을 했다. 이때 꼬마 카타리나는 동정의 서원을 하고, 평생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나중에 카타리나가 성장하자 부모는 결혼을 시키려 했지만, 카타리나는 어린 시절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야기 하며 결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러 머리를 짧게 자르는 등 여성적 매력을 숨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카타리나는 수많은 영적 유혹을 당하게 된다. 영적 성장을 위해선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 마음에 끊임없이 정결치 못한 생각이나 상상이 일어났다. 이에 카타리나는 이틀에 30분만 자는 고행에 나섰다. 멸망의 길로 빠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연히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어느 날 카타리나가 고통으로 인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 그 생생한 대화가 카타리나의 저술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 카타리나 : "나의 주님! 악마들이 그 숱한 음란함을 통해 내 마음을 괴롭혔을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 주님 : "나는 네 안에 있었다."
▲ 카타리나 : "오! 주님 친히 진리이신 당신 앞에 나는 엎드려 말씀드립니다. 내 마음은 혐오스럽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떻게 당신께서 거기 계실 수 있었는지요?"
▲ 주님 : "그러한 생각과 유혹들이 네 마음 안에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즐거움이었느냐, 고통이었느냐, 기쁨이었느냐, 슬픔이었느냐?"
▲ 카타리나 : "큰 고통과 갈등이었습니다."
▲ 주님 : "네 마음 중심에 숨어 있는 내가 아니라면 누가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겠느냐 내가 거기에서 현존하지 않았더라면 음란한 생각이 가득찼을 때, 너는 쾌락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원수들로부터 유혹 당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너의 구원을 위해 숨어서 아무 흔들림 없도록 너를 보호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는 네게 더 친밀하게, 더 자주 나를 드러내 보이리라."
카타리나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느꼈으며 이후에는 어떠한 유혹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카타리나는 이후 3년간 기도, 묵상, 노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준비를 하고, 18세 때 성 도미니코의 제3회에 입회했다. 이 회의 회원은 수도원에 들어가서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세속에 있으면서 성 도미니코의 정신을 따라 가능한 한 복음의 권고를 실천하며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회였다. 이후 20세에 카타리나의 영적 성장은 이미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대부분 과부들로 구성되어 있던 도미니코 제3회는 빈민층에 대한 봉사가 주 소임이었다. 카타리나는 주로 병자들을 보살폈고,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돌봤다. 특히 1370년의 대 기근과 1374년의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는 육체가 쇠진할 정도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카타리나가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카타리나는 이와 함께 엄격한 금욕생활도 이어나갔다. 그녀는 주위에서 염려할 정도로 식사량을 줄여나간 반면 영성체를 자주 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금욕생활이었다. 하지만….
(2) "아버지 당신께 제 영혼 맡기나이다"
선한 행동과 거리를 두고 있는 이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카타리나는 어려움에 처한 불우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은 채 헌신했다. 남의 집 청소까지 맡아서 해 주는 등 손발이 닳도록 일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 대한 모함도 만만치 않았다. 암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은 카타리나에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카타리나에 대해 근거 없는 모함을 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조금도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고 여인을 계속 도왔다.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여인을 간호했다. 의도적으로 기분 나쁘게 대하는데도 기분 나빠하지 않으면, 기분 나쁘게 대한 쪽에서 오히려 더 당황하는 법이다. 그래서 여인은 그런 카타리나를 더 혹독하게 대했다. 그러자 카타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배은망덕한 유대인들이 당신을 저주하며 모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성스러운 사업을 결코 중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겨우 두세 번 악담을 들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명하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덕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마침내 카타리나의 성덕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카타리나의 거룩한 영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깊이를 더했다. 종종 주님의 발현을 뵙는 은혜를 받기까지 했다.
하루는 예수께서 한 손에는 황금 관을 다른 한 손에는 가시관을 들고 나타나서 "나의 딸아, 어느 것이든 하나를 선택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카타리나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가시관을 잡아 머리에 쓰며 "저는 황송하옵게도 주님의 배필로 선택된 자로서 주님과 같은 고통의 가시관이야말로 적합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고통에 대한 청원은 받아들여진다. 1374년 주님께서 재차 발현하셔서 그의 몸에 오상을 박아 주셨다. 카타리나는 그 상처를 평생 동안 숨겼는데, 죽음이 가까이 와서야 타인의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졌다.
여기서 오상의 고통을 받은 성인 성녀들은 이렇게 대부분 스스로에게 드러난 기적을 숨겼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비오 성인도 그랬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한 현상을 교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다니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성인과 성녀들은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기적들을 숨기려고 애썼다.
그런 카타리나에게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네게 지식과 웅변의 은혜를 줄 것이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위정자와 지도자들에게 내 소망을 전하라."
이에 카타리나는 주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다. 1374년 카타리나 성녀는 당시에 치열했던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피사를 방문했다. 당시 교회는 교황파와 대립 교황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는데 카타리나는 늘 정통 교황파에 서서 교황의 정통성 확보에 이바지했다. 1309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옮겨져 있었는데, 카타리나는 직접 그곳을 찾아가 교황님을 알현하여 1376년 교황청이 로마로 다시 돌아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카타리나의 공이 지대했던 것이다. 그녀의 사명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당시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 중에는 사치 생활로 기울어진 이들이 많았다. 카타리나는 이를 크게 염려하며 거리낌 없이 그 개혁 방법을 교황에게 올리기까지 했다. 카타리나는 또 설교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주변에 추종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교가 사제의 절대 고유 권한으로 여겨지던 시절, 한 여성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카타리나의 영적 능력과 지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서서히 주님의 품에 안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380년 카타리나는 먹고 마시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며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해 2월 29일 3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성혈, 성혈, 성혈"이라는 말을 거듭 외치다가 예수님처럼 눈을 감고 "아버지 당신 손에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461년 6월 28일 교황 비오 2세는 카타리나를 성녀로 시성하셨고, 1866년 4월 1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0년 5월 15일 카타리나를 이탈리아의 첫 수호자로 공포하고, 1943년 9월 15일 그녀를 모든 간호사의 수호자로 삼으셨다.
(3) "예수님의 배필로 영원히 살아가겠다"
이는 껍데기만 아는 것이다. 성인 성녀의 삶이 진정으로 나의 삶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 상황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께서 섭리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성의 진수를 맛보는 것이다.
우선 카타리나 성녀의 선종한 나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33세에 선종했다. 태어난 해와 연도는 다르지만 정확히 예수님과 같은 나이에 하늘에 올랐다. 성녀의 삶이 이렇게 짧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그랬듯이 그 짧은 생애 속에서, 주어진 일 해야할 일을 모두 완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는 훗날 교회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된다. 평신도였고 더군다나 여성이었다. 그녀는 학문을 배우지 않았던 분이다. 글도 선종 3년 전에야 겨우 깨우쳤다고 한다. 30세까지 일자무식으로 살았던 분이다. 그랬던 그녀가 어떻게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동급의 교회 박사가 될 수 있었을까. 카타리나 성녀의 삶은 참으로 신비롭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어린 시절이 남다르다. 형성하는 신적신비인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신비 체험을 초등학교 입학전 나이에 했다고 한다. 수준 높은 관상가도 아닌데, 어린 시절에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사실 어린 시절의 신비 체험은 대부분 부모의 영향이 크다. 부모의 깊은 신심이 아이들에게 심어지고, 그때 그 아이들이 모방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기도를 하면 아이들도 기도를 하고, 부모가 매일 "돈! 돈! 돈!"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도 돈만 알게 된다. 돈만 밝히는 자녀를 두었다면, 자신들이 먼저 돈만 밝히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부모가 매일 저녁 식사를 한 뒤,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해 보라. 만약 이웃집 보는 눈이 쑥스러워 길거리에서 묵주기도를 하기 힘들다면 집안에서 성경 필사를 한 번 해 보라. 성경 필사가 부담스러우면 그냥 성경을 함께 읽어도 된다. 아이들이 달라질 것이다. 부모가 성체조배를 하면 아이들도 성체조배의 참맛을 알게 된다. 부모가 기도하면 아이들도 기도한다. 그래서 신앙도 깊어지게 된다. 아이들은 이렇게 부모를 닮는다.
카타리나 성녀의 부모도 분명, 카타리나에게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줬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에 카타리나는 7세 때 평생 동정을 바라며, 스스로 서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당 복사들에게 요즈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외교관이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고, 음악가, 선생님 등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도 있다. 대답이 다양하다. 그런데 신부님 수녀님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저는 결혼할 거예요"하고 말한다.
그런데 카타리나의 대답은 달랐다. "결혼하지 않겠다"였다. "예수님의 배필로 영원히 살아가겠다"였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독신과 결혼의 길은 분명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이다. 결혼하는 것, 대단히 좋은 일이다. 결혼 성소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그런데 똑같은 비중으로 독신 성소도 아름답다. 카타리나는 그 독신 성소를 받은 것이다. 이러한 성소에 대한 확신은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다. 부모는 카타리나의 결심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늘 기도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그녀의 확고한 모습을 보면서 차츰 마음을 돌리게 된다. 형성적 영성을 완성해 나가는데 있어서 세속적인 반대라는 위기 상황을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카타리나가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묘한 일이 벌어진다. 본능적인 성에 대한 유혹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온 것이다. 사춘기다. 길거리에서 봤던 멋진 남자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을 것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남자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듯이 카타리나 성녀도 그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15세 소녀 카타리나는 이런 유혹에 적극 대처한다. 이틀에 30분 꼴로 잠을 잤다. 잠을 자지 않는 시간에 늘 깨어 기도했다. 혹독한 고행이다. 이런 고행은 진정한 영적 갈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갈망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된다.
(4) 혼돈과 어둠의 시기에 예언자적 역할 수행
그리스도는 찾으면 오시는 분이다. 아니, 늘 옆에 계신데 우리가 찾고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카타리나는 자신이 성적인 충동에 휩싸여 있을 때 당신이 어디에 계셨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늘 너와 함께 있었다고 대답한다. 카타리나가 놀라서 "어떻게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찬 저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오히려 카타리나에게 "성적 욕망에 휩싸였을 때 기뻤느냐 아니면 고통스러웠느냐"를 묻는다. 카타리나가 고통스러웠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 고통 한가운데에 자신이 섭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 고통, 그 슬픔 가운데 함께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카타리나의 내면에는 정신적 창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영적인 창고 즉 마음의 창고가 있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영적인 창고에 머무르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고통을 받아도 예수님은 그런 부족한 우리 안에서 늘 함께 머무르신다.
이후 카타리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육체적 유혹에 흔들리는 일이 없어졌다. 또 한 차원 높은 진정한 영적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이 가운데서 카타리나는 3년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세워 나갔다.
그러다 18세 때 수도회 제3회에 입회하게 된다. 그렇게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고, 환자와 함께하며 8년을 보냈다. 그런데 당시 카타리나가 접해야 했던 세계 형성의 장(場)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흑사병이 휩쓸고 있었다. 유럽 전체 인구의 1/3 혹은 1/4이 죽은 대 참사였다. 성직자의 40%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교회도 사회도 붕괴 일보 직전이었다. 또 당시 유럽에선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더 나아가 교회도 1309년에서 1377년까지 68년간 교황님들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연히 교회는 프랑스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복잡한 교회사의 내막을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교회로 볼 때는 참으로 아팠던 시기였다.
1000년 넘도록 교회는 성화하고 발전해오면서 좋은 역할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시행착오들이 일어나게 된다. 하느님은 은총을 계속 주시는데,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면 언제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는 반드시 하느님에 의한 또 다른 섭리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타리나는 바로 그 섭리의 한 방편이었다. 카타리나는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예언자적 역할을 하도록 불림을 받은 분이었다.
오상이 무엇인가. 당신과 완전히 하나, 즉 합치를 이룬다는 증표다. 그 오상과 함께 소임을 맡기신다. 바로 프랑스에 머물고 계신 교황님을 로마로 모셔오도록 한 것과 교회의 쇄신을 이끌도록 한 것이다. 카타리나는 이 소임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교황님이 로마로 돌아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카타리나는 또 일부 사치와 향락에 떨어진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는 그리스도와 완전한 합치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30대 중반도 되지 않은 젊은 카타리나는 완전한 합치의 삶을 살았고 그 힘으로 교회를 쇄신했다.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는 카타리나를 14세기 혼란 가운데서 태어나도록 섭리하셨고, 당신과의 합치로 이끄셨고, 그 영향을 통해 교회를 바로 잡으셨다. 카타리나는 33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형성은 물론, 세계 형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 어떤 유혹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영적인 차원에서 하느님과 영감과 갈망을 주고받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유혹들을 극복했고, 형성의 초대에 완벽하게 응답했다. 문제는 한 사람의 완벽한 형성은 단순한 한 개인의 형성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카타리나의 완벽한 형성은 바로 세계 형성으로 이어진다. 교회를 쇄신했고, 결국 세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한 개인을 형성시키시고, 다음으로 그 주변 사람들을 형성시키시고, 세계를 형성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하느님의 형성 의지에 동참하겠다는 우리 개개인의 동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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