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영보 프라 안젤리코 1442-43년, 프레스코화, 230 x 297cm, 북쪽 복도, 이탈리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성화해설: 박혜원>
중세 말기 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르네상스의 새로운 개혁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신인간(homo novos)’,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400?-1455년). 스무 살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작품활동을 한 수사 화가로 그의 작품에서 배어나오는 깊은 종교정신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께 봉헌한 성스러운 삶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뛰어난 예술성뿐만 아니라 덕스러운 성품을 겸비한 그는 화가로는 예외적으로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복하여 복자품에 올랐다.
영국 비평가 러스킨이 “미술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영감을 받은 성자”라고 평할 정도로 그는 예술창작과 신앙이 합치된 모범적인 종교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연광에 비치는 볼륨감 넘치는 인물 표현을 가능케 한 르네상스의 혁신적인 자연주의적 표현과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년)의 영향으로 원근법적 공간 표현을 그의 그림에 적용하는 데 소극적이지 않았다. 한편 그는 지난 2월호에서 소개한 조토(1267?-1337년)보다 후대 사람임에도 중세의 장식적인 양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찾으려는 데에 초점을 맞추려기보다 수사로서 중세의 깊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이어받아 이를 아름답게 드러내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최대한 개인적인 영감의 발현을 억제하고 신앙에 봉사하는 것으로 예술 전통을 유지하고자 한 도미니코 수도회의 방침을 잘 준수하면서도 동시에 진보적 경향을 받아들인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는 수도회의 기도서와 성가집의 수사본을 직접 장식하기도 하였는데, 그 섬세하고 밝고 화려한 색감은 그의 화풍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페이지의 첫 알파벳을 장식하는 중세의 전통에 따라 ‘R’의 상단 부분에는 성부가 비둘기 형상의 성령을 내려주고 있고, 그 아래에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리라는 몸짓을 취하는 마리아가 두 손을 포개 가슴에 얹고 하늘에서 내려온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주는 천상의 메시지를 경청하고 있다.
1436년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은 도미니코 수도회의 관할이 되었고,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년)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보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내부장식은 프라 안젤리코를 중심으로 여러 화가가 참여하여 거의 50여 점에 달하는 프레스코화와 대제단화 그리고 성가집의 수사본을 제작하였다. 그가 장식한 수사본 페이지 가운데, ‘성모 영보’의 섬세하고 밝고 화려한 색감은 프라 안젤리코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산 마르코 수도원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1228-1274년) 성인의 대표 저서인 “신학대전”(1267-1273년)에서 기술한 대로 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에피소드를 설명한 글을 토대로 하여 예수님 생애의 주요 장면을 프레스코화로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 ‘성모 영보’(1442-1443년)는 루카 복음 1장 26절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프라 안젤리코가 여러 차례 다룬 주제이다.
천상에서 방금 날아와 미처 날개를 접지도 못한 채 다소곳이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가브리엘 대천사와 이 갑작스런 방문에 약간 어리둥절한 마리아의 표정이 친근하다. 이미 요셉과 약혼한 상태인 순결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엄청난 소식을 듣고 있는데, 이에 대해 마리아는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천사가 부르는 ‘아베 마리아’는 아담을 불순종과 악의 나락으로 유혹한 에덴의 ‘하와(Eva)’와 상반된다는 의미로 ‘에바(Eva)’를 거꾸로 한 ‘아베(Ave)’로 가브리엘은 ‘아베 마리아(Ave Maria)’, 곧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며 소식을 전하고, 이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천사와 마리아 둘 다 두 손을 가슴에 얹은 겸손과 존중의 자세로 대면하고 있다. 중세의 절제된 양식의 수도원 회랑에 있는 마리아는 단순한 백색의 옷 위에 푸른 망토를 두르고 역시 소박한 나무 의자에 앉아있고, 분홍빛 옷을 입은 천사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날개는 그이가 천상 존재임을 말해준다.
이 작품에서는 중세 양식을 고수하면서도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르네상스의 투시원근법과 휴머니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건물의 기둥과 바닥이 만들어내는 명암과 공간의 입체적인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빛은 좌측으로부터 흘러들어와 우선 천사의 어깨를 환히 비춘 다음 건물 안쪽에 있는 마리아에게는 은은한 빛으로 순화되어 조심스레 비춘다.
수도원의 좌측에는 에덴 동산을 연상시키는 울타리 쳐진 정원이 아기자기 푸르고 아름다운데 이는 중세의 장식적인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당시 고대 그리스, 로마로의 ‘부활’을 꿈꾼 르네상스 인들은 이성화된 체계와 과학적인 경험을 기초로 하는 인간 탐구를 통해 중세의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 변해갔다. 그 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정신의 후계자인 프라 안젤리코는 인간 안에서의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추구했으며, 지성과 사고의 개별화를 거부했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었고 바로 이러한 세계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계라고 믿었다. 여기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에서와 같이 천상과 지상의 만남은 요란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조용하고 평범하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래의 ‘성모 영보’(1440-1442년)는 제3기도실 벽면에 그려진 것으로, 역시 ‘주님 탄생 예고’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천사와 마리아는 더 이상 동격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가브리엘은 고운 자태로 서있는 반면, 마리아는 무릎을 꿇어 더 겸손한 낮은 자세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 역시 둘 다 존중의 표시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데, 천사의 의상은 진분홍빛이고 마리아는 연분홍으로 더욱 단순해졌다. 얇은 분홍색 옷을 입은 마리아의 야리야리한 실루엣에서는 그 어떤 볼륨감도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비물질화된 느낌을 준다. 이는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놓은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는 마당의 푸른 뜰도 생략되었고, 회랑 좌측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초대 순교자인 베드로 성인이 두 손 모아 마리아를 향해 기도하고 있는데, 그의 몸 절반을 과감하게 잘라내어 표현함으로써 천사와 마리아의 모습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하고 있다. 회랑 천정의 십자 모양으로 횡단하는 아치는 이 단순한 실내에 은은한 리듬감을 준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그 어떤 거동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긴장감이 맴도는 거룩한 순간이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천사와 같은 형제’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연출해 내는 맑고 순수한 색채 효과, 간결한 선과 구도 그리고 단순한 형태로 담아낸 고결한 그림은 그 어떤 극적인 과장 없이 절제되게 표현되어 그 감동은 더욱 깊고 은은하게 전해진다. 정신과 육체, 천상과 지상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다.
성모 영보’, 1440-1442년, 프레스코화, 176 x 148cm, 제 3 기도실, 이탈리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박혜원 소피아 - 화가. 벨기에 브뤼셀 리브르 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 판화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한양여대, 상명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2003년 평화방송 ‘함께 보는 교회미술’을 진행했다.
|
'<가톨릭 관련> > ◆ 성화 & 이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녀 마르가리타와 용 / 라파엘로 (0) | 2011.11.15 |
---|---|
성모 마리아의 교육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0) | 2011.11.15 |
성모영보 / 로렌초 로토 (0) | 2011.11.15 |
십자가 처형 / 오토 랑즈 (0) | 2011.11.15 |
아담과 하와 / 알브레히트 뒤러 (0) | 2011.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