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책형 / 마르크 샤갈 1938년, 캔버스에 유화, 155x140cm,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붓으로 노래하는 시인’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은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로 시작하는 김춘수 시인의 서정시로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이다. 그는 러시아의 비테브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이 작고 가난에 찌든 유대인 마을에서 겪은 유년시절의 기억이 그의 예술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어린이의 눈으로 본 종교의 세계가 샤갈의 붓을 통해 캔버스 위에 녹아내리는 순간 몽환적이고 서정적이며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재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는 현실적, 사실적 이미지를 위한 어떤 시도도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사실이 배제된 감미로운 색조와 꿈결 같은 형상을 본 순간 우리는 현실의 고통이라는 무거움과 괴로움의 시름을 내려놓고 아련한 과거의 향기로운 추억과 향수에 젖으며, 꿈의 선율로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게 된다.
샤갈의 눈에 비친 박해받는 유대인이라는 현실을 자신이 경험한 유년시절의 기억과 조화시켜 표현한 걸작이 1938년 작 ‘하얀 책형(White Crucifixion)’이다.
1938년은 나치 독일이 본격적인 유대인 사냥을 개시한 해로, 그해 11월 9일, 독일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유대인 상점과 가옥, ‘사나고그’라 불리는 유대인 회당이 습격을 받았다. 이날의 난동으로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91명의 학살되고 유대인 상점 7,500여 곳이 파괴되었으며, 시나고그 400여 곳이 불에 탔다. 우리는 이 밤을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곧 ‘수정의 밤’이라는 얄궂은 말로 부르는데, 유대인 공포의 밤에 그들 가게와 회당에서 깨져 나온 유리 조각들이 수정처럼 빛났던 탓에 붙은 이름이라는 일설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 그림은 샤걀이 느낀 이날의 충격을 세계 유대인들의 고통으로 치환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군복을 입은 일련의 군사가 붉은 기를 앞세우고 전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나치인지 아니면 러시아의 유대인 구역을 습격하는 혁명군인지 분명치 않으며 그 붉은색 깃발도 정확한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이 독재의 압제로 큰 화염에 싸여 아수라장으로 변한 유대인 구역이 그림 곳곳에 보인다. 집도 불타고 회당도 불길에 휩싸인 채, 집들과 기물들은 엎어져 있고, 종교적 심성을 지닌 순박한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려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른다.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인지 깊은 상념에 젖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옛날부터 시련과 고통 속에서 추방되고 격리되어야 했던 해방과 자유에 대한 이들의 염원이 배를 탄 한 무리의 인물들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에서 오른편 아래쪽의 유대교와 유대인 생활의 기본이 되는 토라가 바닥에 나뒹굴고, 보따리를 둘러메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피하는 남녀의 모습에서 당시 상황이 샤갈의 마음에 얼마나 긴박하게 비쳤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 왼편으로는 유대인 두 명이 토라를 품에 안고 피신하는 모습과 함께 가슴에 흰 천을 두른 노인이 있다. 들판의 풀처럼 숱한 세월 추방과 박해의 고통에도 존재해 온 유대인들의 모습으로, 푸른 작업복을 입은 노인의 가슴에 달린 천에 샤갈은 교묘하게 ‘나는 유대인이다.’라는 글귀를 새겨놓고 있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보아온 유대인들의 가난한 생활 저변에 있는 은밀한 자의식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림의 위쪽, 십자가 위에는 샤갈 작품의 단골손님인 부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유하는 사람들이라는 환상적 이미지는 대개의 경우 연인이나 음악가 등 기쁨과 환희에 찬 존재들이다. 지금 비탄과 통곡에 오열하는 이들은 가톨릭 성인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 특히 신심이 깊은 유대인들임에 틀림없다.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은 유대인 남자가 아침기도 때 사용하는 숄 탈리스를 머리에 걸치고 있으며, 한 사람은 가죽으로 된 작은 상자를 이마에 대고 있다. 이 상자는 구약의 한 구절을 적은 양피지가 들어있는 성구함으로, 유대인들이 아침기도 때 이마와 왼팔에 잡아맸던 것이다.
이런 정황의 한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그 앞에는 유대교의 상징인 일곱 가닥의 촛대가 놓여있다. 이 부분이 유대인답지 않다. 유대인이 생각한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구세주가 아니라 다만 예언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가? 지금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예수가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이미지와 함께 우리 눈앞에 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 샤갈의 유연한 종교적 태도를 볼 수 있다. 비록 예수의 머리 위에 I.N.R.I. 곧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가 히브리어로 쓰여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실상 이 그림에서 예수는 구세주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비도덕적 악행의 희생과 불행에 대한 고독한 사랑의 사도로 비추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이 행한 재앙과 불행 앞에서 무구와 희생이 흰색의 공간으로 재현되고 있으며, 바로 그 인간 본연의 자세를 암시하는 흰색으로 인해 인간 욕망을 표현하는 다채로운 색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십자가의 기둥을 대신하는 사선의 흰색기둥이 전쟁과 학살이 난무한 현장에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 이 그림은 인간의 잔인한 행위에 대한 성적적 고발인 것이다.
우리는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라는 그림을 기억한다.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독일 콘돌 용병의 비행기로 쑥대밭이 된 스페인 한 도시의 참상에 분개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과 샤걀의 ‘하얀 책형’ 모두 독일 나치의 작악한 행위를 향한 무언의 저항인 것이다. 피카소의 저항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반면, 샤갈의 그림은 현실초월적 의미를 지닌다. 십자가 기둥으로 묘사된 흰 빛이 캔버스의 사방으로 퍼지면서 탈출과 화재와 약탈 역시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함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닌가? 바로 샤갈 특유의 서정적임 환상적인 붓이 ‘하얀 책형’이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시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조각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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