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왕과 성스런 얼굴 / 조르주 루오 (‘늙은 왕’, 1937년, 캔버스에 유채, 77x54cm, 미국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 (‘성스런 얼굴’, 1933년, 캔버스에 유채, 91x65cm, 프랑스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년)는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내세운 파리코뮌의 대포 소리가 한창이던 1871년, 파리의 한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학살과 전란 중에 태어난 고독한 존재라서일까. 그는 “나에게 회화는 삶을 망각하는 방편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실제 그의 삶은 도시 어두운 그늘의 가난과 슬픔과 질병 등 인생의 가장 험난한 고통과 함께하는 운명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비극의 운명이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을 길들였으나, 세상에 대한 그 격정은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거장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로 과거의 진부한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생생한 표현과 풍부한 색감과 질감을 기반으로 한 그의 독창적 예술세계의 자양분이 된다. 그리고 이런 그의 비극적 세계관과 드라마틱한 표현력은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전향’이라 할 만한 종교적 신념으로 회귀하게 되는데, 이런 세 가지 그의 독특한 사상과 기법이 만난 작품으로 ‘늙은 왕’과 ‘성스런 얼굴’을 들 수 있다.
흔히 왕은 세상의 권력과 영화를 누리는 자로 인식된다. 그러나 ‘늙은 왕’에 나타난 왕의 이미지는 침울하고 고독하며 무언가를 상실한 듯한 비애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가 쓴 화려한 황금왕관도, 그의 목에 걸린 황금목걸이도, 그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꽃도 그 빛을 잃고 있다. 그 상실은 한편 세속의 권세와 영광을 잃은 무력한 왕의 모습일 수 있으나, 다른 한편 그런 세속의 영예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기에 화려한 복장을 한 침울한 표정의 왕은 고뇌에 젖은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고뇌에 젖은 표정이 굵은 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루오가 청년기에 중세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면서 익힌 기법이 회화에 적용된 것으로, 이 강렬한 선을 통해 루오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고뇌를 열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배경의 청록색과 왕이 입은 옷의 붉은색이 작품의 주를 이루면서, 매우 강한 보색효과를 자아낸다. 이 두 색은 바로 중세 이래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신앙과 가난을 즐기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을 그리는 색이다. 루오는 지금 세속의 권세를 뒤로 한 채 삶의 심원한 의미에 침잠한 이 왕에게 종교적 심성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우리 인간 삶에서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운명적으로 고난과 고통에 찬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루오의 종교적 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런 그의 세계관을 강하고 어두운 선과 그 선에 의해 빛을 발산하지 못하는 화려한 색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골고타 언덕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도중 한 여인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준다. 이상하게도 그 수건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혀 이를 기적이라 부르면서 그 얼굴은 성안(聖顔)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성안에는 그리스도의 인내와 고뇌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루오의 ‘성스런 얼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금 이 얼굴은 수의에 찍힌 것이다. 얼굴 주변 사각형 모양의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얼굴 또한 머리와 수염으로 그려진 검은색 선으로 테두리 지어져 있으며, 그의 눈과 코는 밝은 톤의 검은색으로 경계 지어져 있다. 다만 배경의 스템프로 찍은 듯한 노란색과 머리 위의 낙서와 같은 노란 줄무늬만이 성안의 빛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붉다. 그리고 머리 위 노란색 무늬와 배경 아래에도 빨간색이 드리워있는데, 모두 피와 고난의 상징이다. 오히려 머리에 그려진 노란색 빛조차 가시 면류관의 수난으로 보이지 않는가?
루오는 지금 경배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를 그린 것이 아니다. 루오의 종교적 심성이 인간의 죄와 악을 딛고 형성된 것처럼, 이 그림 역시 이런 미움의 충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리스도의 얼굴은 진실을 갈구하는 인간의 고뇌가 나타나 있으며, 분노와 절망을 감춘 고독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나 고뇌와 고독한 존재로서 그리스도는 그 맑은 눈동자와 그윽한 시선으로 현세의 고통에는 아랑곳없는 모습을 보인다. 바로 구세주의 이미지 아닌가? 루오는 세상과 사회 그리고 인간이 저지르는 악을 미워하는 마음의 충동에서 이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이 악의 세상이 구원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그 이면에 둔 것 같다.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해 악이 난무하는 사회가 그리스도 얼굴 주변의 어지러운 배경이라면, 그 혼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 맑고 곧은 시선은 세상의 구원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내뿜으려, 그로 인해 얼굴의 붉은색은 고통의 색이 아니라 악과 맞서는 생명의 빛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특히 순수한 색이라고 하는 빵강과 노랑, 녹색을 위주로 한 두터운 질감과 자유롭고 힘찬 선의 울림이 이런 내면의 종교적 엄숙감을 자아내면서, 루오 내면의 독자적인 신비성을 드러내고 있다. 카미유 모클레르는 루오의 작품에 대해 “이 미친 그림들에서 쓴 담배를 씹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림”이라고 평했지만, 루오가 투박하고 거친 붓 터치와 강렬한 색감으로 보인 종교적 신비는 그를 20세기 최대의 또는 유일한 종교화가라고 칭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이사 53,2).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사 석사,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조각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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