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의 그리스도 / 폴 고갱 (1889년, 캔버스에 유채, 93x73cm, 미국 버팔로 울브라이트 화랑)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원시의 세계를 찾아 나선 예술가’로 일컫는 고갱(Paul Gauguin, 1848-1903년)은 세잔, 고흐와 더불어 프랑스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간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내면의 심리와 인간의 순수한 종교적 심성을 주로 그렸다.
선원이었던 그는 한때 장사를 하였고 증권 브로커로 부를 축적했으나 서른 다섯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 외롭고 가난한 삶을 예술의 투혼으로 이겨간 인물이다. 영국의 소설가 서머셋 몸이 그의 삶을 소재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쓸 만큼 화가 고갱의 인생은 고통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삶 그 자체였다.
도시의 인위성과 문명의 사악함에 권태를 느낀 그는 인간의 시원을 찾아서 문명과 가장 멀다고 생각한 프랑스 부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을 거쳐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 정착하여 고독과 빈곤 속에서 삶을 마감한다. 각별한 우정을 나누던 친구 고흐에게 귀를 자르게 한 사건의 주인이기도 한 고생의 인생역정은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와도 같아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처럼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인간 본래의 모습을 찾아 방황한 고갱은 원시적 자연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독특한 생활을 그림에서 원시적인 건강미로 승화시킨다. 소박하고 들뜨지 않은 자연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화폭에 표현하려던 고갱은 인위에 물들지 않은 새롭고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한다.
이 새로운 기법은 눈으로 본 세계를 단순히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속에서 느낀 꿈과 사상 그리고 상상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것으로, 대담한 변형과 왜곡, 투박한 윤곽선 그리고 강렬한 원색의 색면(色面)을 중심으로 하게 된다. 고갱은 이런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 내면의 소박하고 순수한 심성, 문명의 이기로 상실한 원초적 본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처럼 외형을 통해 인간 내면을 드러내고자 한 고갱의 예술성을 ‘종합주의’라 한다.
이런 조형적 의도로 원시 자연과 인간을 찾아 평생 방황한 고갱의 걸작 가운데 하나가 ‘황색의 그리스도’로, 고갱이 타히티로 가기 전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 이 작품의 배경은 문명과 멀리 떨어진 퐁타방이다. 여기에 그려진 예수상은 그 근처 트레마로 성당의 것이며, 멀리 보이는 언덕은 생트 마르그리트 언덕이다. 그림의 여인들은 퐁타방의 여인들인데, 고갱은 이 지역 사람들이 도시사람들과는 달리 맹목적이며 미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보고 이들의 순수한 내면을 읽었다.
그림은 이런 순수한 인간의 내면을 노란색 자연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흐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노란색은 행복을 향한 염원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고갱이 읽은 자연은 행복의 원천이며, 그 행복한 인간의 전형이 문명과 도시의 인공미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지역의 여인들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 또한 노란색으로 표현한 것은 행복이 물질적 욕망이 아닌 종교적 심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얀 것이 오히려 독이 있다고 했던가? 지금 우리 앞의 그리스도와 가을의 누런 들판이 주님이나 자연이나 푸근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노란색 자연 위에 빨갛게 피어난 나무들은 행복을 향한 무구한 열정이며, 하느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종교적 열정의 표현과 같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종교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 이전에 존재하는 우너초적인 가치요 본성인 것이다.
여인네들의 손을 보라. 투박하지만 노동의 성스런 임무를 다하는 모습이며, 그 손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손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와 여인들의 표정은 사심과 고통이 없는 천진무구한 모습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바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과정이 순탄치 않더라도 그 속내는 만족하는 미소와 빛으로 충만하지 않겠는가? 무표정한 그리스도의 얼굴과 여인들의 담담함에서 하루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의 겸허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고갱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초적인 인간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화면 중경을 보면 돌담이 외로이 펼쳐져 있고, 그 돌담을 넘어가는 어떤 녀석이 보인다. 예수상을 뒤로 한 채 다른 여인을 좇아 담을 넘어가는 녀석의 모습이 도회지 녀석 같다. 바로 성(聖)을 뒤로 한 채 속(俗)을 좇는 도시의 인간들, 아니면 성서에 나오는 예수를 배반한 모된 유다의 모습일 것이다. 선한 인간과 자연에 존재하는 악의 요소이다. 이런 악이 있어 선이 더욱 빛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현실에 존재하는 악 때문인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옥타브 미르보는 이 그림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 무렵 도시에 환멸을 느낀 고갱의 심정이 바로 그랬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보자면 돌담 경계 너머로도 평화로운 정경의 노란색 전원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역시 행복한 공간이다. 인간의 사악한 모습과 그 세계 역시 주님의 세상이라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반영하는 듯하다.
이처럼 고갱은 그림을 정신과 물질, 성과 속, 선과 악,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특히 갈색 십자가 위의 예수상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신적인 순수함을 나타내며, 기도를 하는 신앙심 깊은 퐁타방 여인들은 예수님 주변에서 기도를 하는 현실의 여인들이다. 영적 세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현실세계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을 한 자리에 배치하여, 종교와 이성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융합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세계와 환상의 세계 등 다양한 요소가 시공을 초월하여 한 곳에 존재하는 ‘종합적’ 경향의 미술을 상징주의라 한다.
상징주의는 한 대상에서 얻은 느낌이나 심리 상태를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는 미술로, 그렇게 하려면 대상을 분석하기보다는, 생각 이전에 마음에서 형성되는 힘을 포착하여야 하며, 포착한 마음의 힘을 색과 선으로 표현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 종교와 이성 등 한계와 제약을 초월한 고갱의 화면은 시각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고전주의 예술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데,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고갱은 인간 영혼의 가장 섬세하고 주관적인 측면 곧 내적 생명력의 신비로운 영역을 탐구했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소통시키려는 고갱의 순진무구한 시도를 바로 ‘황색의 그리스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란색의 주님을 닮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 않은가?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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